2005년 04월 17일
좋은 나이 마흔
좋은 나이 마흔 (조선희)
스물은 좋은 나이다. 김지하 세대가 4.19 격문을 쓴 나이고, 청계천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든 채 분신한 것도 스물 남짓이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십대들이 입시강박과 공부 고문에서 벗어나 마침내 합법적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바로 그나이이기도 하다. 이제, 바야흐로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오고, 그가 이론과 실재, 꿈과 현실의 명확한 구분을 받아들이기까지, 그가 바깥세상과 섞이고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마찰열은 간혹 혁명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하고 록이 되기도 한다. 청춘 예찬의 숱한 글과 노래와 영화가 있을 법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른은 서성거려지는 나이다. 만개한 꽃이 막 지려 할 때의 안타까움이라고 할까? 그저 잔치가 끝났다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양가적 가치가 그 나이에 걸려 있다. 정박하려는 욕망과 떠나려는 욕망.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철학적 소설 <삼십세>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했다. 모든 묵은 것들에 퇴거를 신고하고 익명의 풍요로운 도시 로마를 향해 여행을 떠나느냐, 아니면 세상에 대해 겸허해져서 하나의 의무를 찾고 봉사를 자청한 나머지 한 그루의 나무를 심거나 어린애를 만드느냐, 하고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한 뼘의 땅에 뿌리내리는 선택을 할 것이고, 그래서 시인 강은교는 그 나이를 '새장 문을 열어줘도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는 새'에 비유했다. 그 나이에 기형도 같은 시인은 매일같이 죽음을 음유하다가 어느 날 파고다극장 객석에 앉은 채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체로 서른은 넘기면서 사람들이 나이에 무덤덤해지고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건 한 뼘의 땅과 가족의 울타리에 정착한 것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으나, 꼭 그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삶에서 만고불변의 유일한 진실인 무상(無常), 즉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여유일 수도 있다. 나이는 곧 시간이고,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시간의 흐름을 즐기고 자신의 변화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서글픈 서른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에도, 기형도 이후 10년을 더 살고 나서도, 마흔이라는 생소한 나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맞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건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보는 것이기도 하고, 정착과 떠남의 이분법을 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이는, 박완서가 오랜 부엌살림의 저 깊은 밑바닥에 저장해 두었던 전쟁의 기억과 가족을 잃은 상처들을 길어올려 문학창작의 대장정에 나선 바로 그 나이이기도 하다.
1999/01/09 씨네21 편집장이 독자에게
***
마흔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다만 요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자주 느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얻게 될지를 알게되는 느낌.
그것이 아마도 20대 때와는 달라진 것이리라.
(근데 난 한 뼘의 땅과 가족의 울타리에 정착한 듯 싶지는 않은 게 문제다.)
스물은 좋은 나이다. 김지하 세대가 4.19 격문을 쓴 나이고, 청계천의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든 채 분신한 것도 스물 남짓이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십대들이 입시강박과 공부 고문에서 벗어나 마침내 합법적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바로 그나이이기도 하다. 이제, 바야흐로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오고, 그가 이론과 실재, 꿈과 현실의 명확한 구분을 받아들이기까지, 그가 바깥세상과 섞이고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마찰열은 간혹 혁명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하고 록이 되기도 한다. 청춘 예찬의 숱한 글과 노래와 영화가 있을 법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른은 서성거려지는 나이다. 만개한 꽃이 막 지려 할 때의 안타까움이라고 할까? 그저 잔치가 끝났다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양가적 가치가 그 나이에 걸려 있다. 정박하려는 욕망과 떠나려는 욕망.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철학적 소설 <삼십세>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했다. 모든 묵은 것들에 퇴거를 신고하고 익명의 풍요로운 도시 로마를 향해 여행을 떠나느냐, 아니면 세상에 대해 겸허해져서 하나의 의무를 찾고 봉사를 자청한 나머지 한 그루의 나무를 심거나 어린애를 만드느냐, 하고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한 뼘의 땅에 뿌리내리는 선택을 할 것이고, 그래서 시인 강은교는 그 나이를 '새장 문을 열어줘도 더 이상 날아가지 못하는 새'에 비유했다. 그 나이에 기형도 같은 시인은 매일같이 죽음을 음유하다가 어느 날 파고다극장 객석에 앉은 채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체로 서른은 넘기면서 사람들이 나이에 무덤덤해지고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건 한 뼘의 땅과 가족의 울타리에 정착한 것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으나, 꼭 그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삶에서 만고불변의 유일한 진실인 무상(無常), 즉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여유일 수도 있다. 나이는 곧 시간이고,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시간의 흐름을 즐기고 자신의 변화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서글픈 서른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에도, 기형도 이후 10년을 더 살고 나서도, 마흔이라는 생소한 나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맞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건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보는 것이기도 하고, 정착과 떠남의 이분법을 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이는, 박완서가 오랜 부엌살림의 저 깊은 밑바닥에 저장해 두었던 전쟁의 기억과 가족을 잃은 상처들을 길어올려 문학창작의 대장정에 나선 바로 그 나이이기도 하다.
1999/01/09 씨네21 편집장이 독자에게
***
마흔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
다만 요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자주 느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얻게 될지를 알게되는 느낌.
그것이 아마도 20대 때와는 달라진 것이리라.
(근데 난 한 뼘의 땅과 가족의 울타리에 정착한 듯 싶지는 않은 게 문제다.)
# by | 2005/04/17 14:51 | 寸鐵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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