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달콤한 인생 + 주먹이 운다

김지운, 류승완.
ⓒ 한겨레 (좌측이 김지운 감독. 우측이 류승완 감독)

10년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감독 사이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르영화' 감독이라는 점. 무엇보다 이들은 정통 충무로 출신도 아니고 힘겨운 연출부 생활을 겪지도 않았으며 정통 영화전공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편 극영화 감독으로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는 점 때문에 '영화광'들로부터 부러움과 시기의 눈길을 받는다는 점이 또한 공통된다. 두 감독은 이번 4월 1일 새로운 영화 하나씩을 선보였다. 이번 신작은 김지운 감독에겐 <조용한 가족>, <반칙왕>, <장화, 홍련>에 이어 네번째 장편극영화였고, 류승완 감독도 단편 모음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포함하면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에 이어 네번째로 상업 극장에 내건 장편영화였다. 둘의 친분 관계에다가, 양쪽 영화에 '오달수'가 모두 출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번에 두 감독의 '대결'은 어찌보면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어쨌든 이들은 거의 동시에 '마초영화' 한편씩을 들고 나타났다.

[영화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이하 내용을 보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먼저, 김지운 감독의 신작 <달콤한 인생>.
김지운 감독의 전작들은 의도했곤 그렇지 않았곤 간에 결과적으로, 영화 경력이 그리 많지 않은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주연급 톱배우로 거듭나게 한 작품들이었다. <조용한 가족>의 최민식, 송강호, <반칙왕>의 장진영, 정웅인, 김수로, <장화, 홍련>의 염정아, 임수정, 문근영은 그 영화들을 기점으로 하여 개인적인 필모그래피가 거듭난 셈이었다. 반면 이번 <달콤한 인생>은 '이병헌'이라고 하는 한류스타에 기대는 바가 큰 편이었다. 80년대 에로영화들 이후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김영철, 특별출연이라는 크레딧이 이해되지 않을만큼 비중이 큰 역할을 맡은 황정민, <살인의 추억>의 과격무식한 조형사 역으로 기억되는 김뢰하, 그리고 <말아톤>의 코치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이기영은 물론, 아직은 신인급 연기자라 할 만한 신민아와 문정혁(에릭) 등도 호연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분명 이병헌의 영화였다. 이병헌 덕분에 이 영화는 이미 해외판매 실적만으로도 제작비는 뽑았다고 하니, 이 영화는 분명 김지운의 영화라기보다 이병헌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 Bitter-sweet Life"이지만,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60년작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일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는 호텔바의 이름이 바로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다. 펠리니의 이 영화가 결코 달콤하지 않은, 그러니까 진부함 끝에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 '삶'을 그리고 있듯이,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장편데뷔작 <조용한 가족>이 이미 그러했듯, 김감독의 신작 <달콤한 인생>은 제목 자체로 아이러니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은 간단한 편이다. 강사장(김영철)의 젊은 애인 희수(신민아)를 3일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강사장의 심복 선우(이병헌)가 희수에게 묘한 감정을 갖게 되고, 결국 강사장과 선우는 모두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강사장과 백사장(황정민)의 원한을 사게 된 선우가 겪게 되는 끔찍스러운 고통의 형벌들, 그럼에도 끝내 그들을 겨누어 실행되는 선우의 복수는 이 영화의 뻔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긴장감을 적절히 붙잡아 놓는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느와르' 영화를 표방한다.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마초' 영화다. 신민아가 표현한 희수의 캐릭터는 '마초' 영화의 여성인물이 대개 그렇듯, 신비스럽지만 '개성'은 찾아볼 수 없는 인형 캐릭터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장화, 홍련>의 두 여주인공 이상으로 '로리타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캐릭터다. 10대 여성들의 심리에 대한 깊은 관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장화, 홍련>의 다음 영화가 이런 마초 영화였다는 것은 의외라는 생각도 들 정도다.
이 영화가 표방하는 '느와르 영화', 더 폭넓게 보아서 '장르영화'란 본래 기존의 장르 관습을 훌륭히 모방하고 따르는 것이 미덕이다. 선우가 폼나게 바깥의 길을 걸을때마다 과장되도록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은 동서양의 '느와르' 영화들의 인증 마크나 다름없는 장면이었으며, 실내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에서는 비장하게 흘러나오는 음악과 고속촬영된 느린 화면은 관습적으로 응당 적절한 연출이었을 것이다. 느와르 영화의 관습 뿐만 아니라,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은 이 영화에 꽤나 많이 등장한다. 가령 선우(이병헌)가 총기 분해 결합을 강의받는 장면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병헌이 송강호에게 총기 다루는 기술을 자랑하던 장면을 연상시킨다면 재미를 느낄 만한 장면이었다. 선우가 빗속에서 생매장되는 장면, 그리고 땅밖으로 빠져나오는 장면, 그리고 땅을 파던 깡패들이 선우의 탈출 이후 허탈한 듯 내뱉는 장면 등등은 <조용한 가족>을 떠올리면서 끔찍하다기보다는 웃음이 날 법한 장면들이었다. 사실 이 영화에는 김지운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도 살아 있다. 특히 피를 흘리며 고깃덩이처럼 내걸린 선우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대걸레를 들고 바닥의 핏물을 닦아내는 장면이나 총기를 판매하는 명구(오달수)의 코믹한 러시아어 대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사실 이 영화 보면서 자주 웃었는데, 주변 관객 분위기가 그게 아니어서 역시나 뻘쭘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유쾌함도, 감동도, 흥미도 부족하다. 김지운 감독은 <장화, 홍련>에서 그러했듯, '비주얼'에 무엇보다 신경을 많이 쓴 듯 했지만 각각의 비주얼들은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영화 전체적으로는 흐름이 이어지지 못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강했다. 선우가 생활하는 스카이라운지, 그가 끌려다니며 폭행당하는 스산한 창고, 희수가 사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집, 총기를 밀구매하는 비현실적인 공간, 백사장이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스링크 등의 비주얼은 서로 너무나 달라서, 영화 중간중간 "튄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디제님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사실주의 명작인 <초록물고기>의 환타지 버전일지 모른다. 아무리 그렇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의 결말부분에서 마치 이 모든 것이 선우의 '꿈'이었을지 모르는 듯 표현한 것은 너무나 비겁한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문제는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대상이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사실상 김지운 감독의 영화라기보다는 '이병헌'의 영화였다. 아마도 제작자나 배급자, 심지어 감독조차도 이 점을 훼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0여년 전, 우리가 <영웅본색>이나 <지존무상>을 오우삼 영화나 왕정의 영화라기보다는 '주윤발 영화'나 '유덕화 영화'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달콤한 인생>은 한류스타 '이병헌의 영화'이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병헌은 꽤나 고생을 하며 이 영화를 찍었을 것이고, 그런대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병헌이 아니라 이병헌의 캐릭터인 '선우'가 문제였다. 선우(이병헌)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강사장(김영철) 앞에서 "내가 7년동안 당신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이것이냐"고 분노하지만, 관객은 선우가 겪은 7년 세월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다만 선우의 댄디한 스타일만 눈에 띄고, 깡패같지 않은 폼과 매너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조직을 위해 헌신했으나 끝내 버림받는 '깡패'의 이야기는 <초록물고기>나 <넘버3>, 더 나아가 <대부>나 <좋은 친구들>과 같은 영화들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소재이지만, 선우의 경우처럼 불쌍해보이지 않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그저 불쌍한 건 선우가 아니라, 힘들게 고생하며 연기했을 배우 이병헌이었다. 이 느낌은 이병헌의 초기작 "런어웨이"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든 느낌이다.) 더욱이 강사장에게 용서를 구할 몇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는 (터무니없을만큼 고가인) 선물을 건네고 끝내 강사장을 향해 총을 겨눌만큼 '희수'라는 여인이 선우에게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았는지에 대해서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 시절부터 재기발랄한 '시나리오'로 주목받았고, 그 덕에 인기 영화감독으로 자리 잡았던 사람이다. 그가 비주얼과 연기지도에 있어서도 재능을 발휘하게 된 것은 기뻐할 일이겠지만, 극단적인 비주얼 중심의 영화였던 <장화, 홍련>에서조차도 그의 영화적 재능은 '내러티브'와 '유머감각'에서 돋보였었다. '느와르'는 영화광 김지운의 짝사랑의 대상이었는지는 몰라도, 영화감독 김지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지향이었던 듯 싶다.
(평점 : ★★☆)

류승완 감독의 신작은 최민식, 류승범 투톱의 <주먹이 운다>였다.
초저예산 단편영화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엮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평단의 전적인 지지를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던 류승완 감독. <다찌마와 Lee>라는 단편을 거쳐 <피도 눈물도 없이>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발표한 류 감독은 '액션' 연출에 있어서는 절정의 내공을 쌓은 감독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 류승완 감독 신작의 스토리도 내내 두가지 축으로 진행되고, 마지막 순간에 하나로 합쳐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꽤나 단순한 편이다. 유상환(류승범)과 강태식(최민식)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만큼 최악의 순간에 내몰린 인물들이다. SBS <휴먼TV 아름다운 세상>에 나온 소년원 출신 헤비급 복서 서철, MBC <생방송 화제집중 6시>에 나온 신주쿠 거리의 길거리 복서 하레루야 아키라가 두 인물의 모델이다. 이 둘이 링에서 맞붙는다면? 이것이 류승완 감독의 신작 <주먹이 운다>의 출발이었다.
유상환은 패싸움이나 '삥뜯기'를 일삼는 전형적인 '양아치'이자 '문제아'다. 류승범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상환'역(류승범은 류승완 영화에서 언제나 '상환'이다.)을 맡았을 때부터 형인 류승완 감독으로부터 "너 평소 하던대로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지만, 특히나 이 영화에선 방금 전까지 삥뜯어내다 온 양아치처럼 완벽한 연기를 보여준다. (어디선가 류승범이 이번 영화 출연료로 수억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보고, 생계문제가 심각한 스탭들이 수두룩한 우리 현실에서 연기경력이 일천한 류승범이 출연료 수억을 받는 건 분명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영화 보고 나서는 시비걸고 싶은 마음이 '꽤 많이' 사라졌다.) <품행제로>나 <묻지마 패밀리>, <와이키키 브라더스>,<아라한 장풍대작전>과는 달리 익살이 배제된 연기로도 그가 충분히 매력적인 배우임을 입증해보이고 있는 셈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장애인 역할을 제외하면 전혀 '웃기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한 것은 이번이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유상환은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짓을 하다가 소년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곳에서 '권투'를 접하게 된다. 막무가내 싸움꾼이었던 그는 쪽팔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권투'를 배운다. 하지만, 그가 권투에 매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가족의 잇단 비극 때문이었다.
"의외로", 류승완 감독은 밑바닥 "OTL" 인생들의 이 이야기를 '가족 휴먼 드라마'로 꾸미기로 결심한 듯 싶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패싸움에 휘말려 실수로 '현수'(김수현)를 죽이게 된 '성빈'(박성빈)은 7년간 소년원과 감옥을 거쳐 출소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사회의 냉대 뿐이었다. ('현수'역의 김수현은 <주먹이 운다>에서 상환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권투부 짱 '권록'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성빈'은 가족들로부터도 멸시를 받게 되고, 현수의 유령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상환 가족들은 그렇지 않다. 막노동을 하는 상환의 아버지(기주봉)는 살갑지는 않지만 마음은 따뜻한 "스테레오타입 아버지"였고, 취로사업에서 푼돈을 버는 할머니(나문희)는 자식과 손주를 위해 헌신하는 "스테레오타입 할머니"로 등장하며, 마지막 순간 상환은 중풍과 치매 증상을 앓는 할머니 품으로 달려들어 눈물을 흘린다.
<해피엔드>, <파이란>, <올드보이>, <꽃피는 봄이 오면>에 이어 또다시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사는' 인물 역할을 해낸 최민식의 강태식은 앞의 네 영화 속 인물을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막다른 인생이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출신 권투선수이지만, 사업을 벌인 공장은 불타고, 빚보증 선 잘못으로 집안 물건은 다 차압당하고, 아내(서혜린)로부터는 이혼을 요구받고, 일일교사로 아들(이준구)의 교실 교단 앞에 서서는 자식에게 무시당할만큼 무식한 아버지일 뿐이었으며, 권투후배(오달수)로부터 두들겨맞기도 하고, 믿었던 또다른 후배(임원희)에게는 연이어 뒤통수 얻어맞는, 그런 인생이다. 그가 택한 최후의 방법은 '만원'을 벌기 위해 아무에게나 얻어맞는 '길거리 복서'의 길이었다.
그런 강태식의 경우에도 영화의 결말은 '가족 휴머니즘'을 향해 나아간다. "조지 포먼은 마흔 다섯에 세계챔피언이 됐다"는 국수집 최사장(천호진)의 말에 자극을 받은 강태식이 신인왕전에 도전하게 되고, 결국 결승전이 끝난 후, 그는 아들 '서진'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흥미로울 수 있었을, 상환과 태식이라는 두 캐릭터가 모두 '가족 휴머니즘'으로 끝맺음하는 이 영화는 참으로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몇가지 디테일로 그 진부함을 뛰어넘는다. 가령, 상환이 '권투부 수칙'을 외우라는 명령을 "특별한 이유"로 거부하는 장면이라든지, 태식이 자살하겠다며 아들을 바퀴벌레약 사오라며 약국에 보내놓고 아내에게 욕정을 느끼는 장면이라든지 하는 부분은 비루하지만 서글프게도 진지한 우리 '삶'에 대한 밀착이 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인물이 맞붙는 순간이 '챔피언전'이 아닌 '신인왕전'이라는 상황은 이 영화가 그저 진부한 '휴머니즘 영화'가 되지 않도록 한 최상의 설정이다. 그 경기에서 이겨봤자, "1전 1승 무패"의 기록을 가진 "신인복서"가 될 뿐이었지만, 그들이 벼랑 끝에서 매달린 건 '로또'가 아니라 바로 '신인왕'이었기에, 그리고 신인이 되어 앞으로 더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함을 알기에, 이 영화는 감동적일 수 있었다.
더욱이 관객들로 하여금, 상환과 태식, 두 인물에 모두 감정이입하게 만들면서,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들의 가족에 감정이입시키면서, 신인왕전 결승전 장면을 바라보게 만든 것은 관객에게도 '삶의 절박함'이 경중(輕重)을 따질 수 있는 문제인지를 물으며, 과연 승패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꼭 나뉘어져야만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 승패는 감독에게 있어서도 매우 고민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박찬욱은 류승완의 고민을 듣고 "카운터 펀치가 심판에게 작렬하여 심판이 쓰러지도록 만들라"는 농담을 하였다고 하고, 달고양이님에 따르면 시나리오의 한 버전은 "태식이 의식이 혼미하여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였다고도 한다. 고심 끝에 류승완이 내린 결말은 다소 작위적인 감동의 결말이긴 했지만, 그리 비겁해보이지는 않았다.
상환과 태식 모두가 승리를 거둔 듯한 이 영화의 결말이 억지스럽기도 하고, 소위 '가족 휴머니즘'을 강요하는 듯해 껄끄럽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제 막 새 길에 발을 디딘 '신인복서'일 뿐이다. 그들의 앞길에, 그리고 우리의 앞길에 또다시 험난함이 놓여 있을 것이기에,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이 아니라, 가슴 한켠이 서늘한 결말로도 다가올 수 있는 영화, <주먹이 운다>였다.
평점 : ★★★☆

두 편의 영화 모두 만족스러운 부분 이상으로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 영화였다. '정공법'으로 접근한 두 영화의 솔직함과 조연급들을 비롯한 배우들의 노력과 연기는 좋았지만,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빈약함은 상대적으로 도드라져 보였다. 두 감독 모두, '이야기' 능력이 있는 감독들이라 믿기에 그 아쉬움은 더욱 컸다. <역도산>도 그러했지만, 저력있는 배우가 애써 노력하여 연기했다고 해서 다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이제 우리 영화도, 감독과 내러티브의 영역을, 배우의 파워가 모두 잡아먹는 시대가 온 것일까. 로버트 드니로나 더스틴 호프만이 말아먹은 영화가 어디 한 둘이었냔 말이다.

p.s. 한국 영화를 보면서 즐거울 수 있는 한가지는 영화속 배경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영화를 볼 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감흥이다. 그러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막 나온 후, 주변을 둘러볼 때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가령, <접속>은 예전 "피카디리"에서, <쉬리>는 "강변 CGV"에서 보아야 제 맛인 영화다. 최근에 나는 <말아톤>을 춘천에서 봤다. ^^;; <달콤한 인생>은 서울 시내 한복판 극장, 가령 <씨네큐브>나 <대한극장>에서 밤시간에 보았다면, 그리고 <주먹이 운다>는 분당 서현역 부근 "CINUS 분당"에서 보았다면 더 좋았을 영화다. 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안다. 그런데, 나는 <달콤한 인생>은 분당에서, <주먹이 운다>는 종로에서 봤으니, 이건 낭패다. ㅡㅡ;

by 갈림 | 2005/04/03 20:18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7)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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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unamoth at 2005/04/04 13:05
주먹이 운다를 한번 더 보고 싶어지네요. 가끔씩 지쳐갈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영화로 남을것 같습니다. / "OTL" 인생에 지지를 보냅니다 :)
Commented by 고기 at 2005/04/04 13:35
달콤한 인생은 보고 주먹이 운다는 안봐서 반만 읽었다. 전적으로 동감이오. 그래도 난 팬이니까 김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거에요~ 아웅;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04 13:35
lunamoth/ 누구보다 심각한 좌절을 겪은 태식이 이래저래 "열받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겠다며 얻어맞는 장면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한 감흥을 안겨주더군요. 국수집 최사장 말대로 "어느 누구 사연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OTL 인생들 화이팅입니다. ^^ (트랙백에 응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04 13:49
고기/ 김..김감독의 팬이 아니라, 문모군의 팬이 아니오? (위에도 인용한 블로거 '디제님'의 말대로, 에릭을 주인공으로 한 버전의 '외전'이 나올 듯한 예감이....)
Commented by 고기 at 2005/04/04 18:40
어우 야 김의 팬이자 문의 팬이란말이야. -///-
Commented by lunamoth at 2005/04/05 01:19
달콤쪽은 안읽었다가 방금 보고와서 읽어 봤습니다. 결말부분 해석은 전혀 생각치 못했습니다. 빠져들어서 그런지... 단순한 관객;이라 그런지...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 전 메가박스에 봤는데 아이파크 타워 (http://kr.blog.yahoo.com/iskra102/1460819.html)가 잠시 비춰져 약간의 감흥은 있었답니다. / 과도한 트랙백인듯 싶어 죄송스럽네요;;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05 03:09
고기 / 으흐흐... ^^;;

lunamoth / 천만의 말씀을.... 단순한 관객은 바로 저이고, 과도한 트랙백을 건 것도 바로 접니다. ㅡㅡ; (^^);;
Commented by 늘꿈속 at 2005/04/11 11:22
어제 메가박스서 '주먹이 운다'를 봤습니다.
두 주인공 외에 조연들도 적합한 배우가 모두 적절한 역할들을 맡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나문희, 변희봉, 임원희,
티비드라마나 영화 에서 유독 영정 사진 등장이 많은 배우 기주봉,
무언가 간직한 사연이 특별할 것 같은 천호진,
올드보이 때는 미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오달수(주차장 씬은 원래 시나리오는 정 반대였다는), 등등등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11 12:01
늘꿈속 / 예전의 한국영화들에 비하면, 요즘 한국영화의 조연들의 연기는 정말 훌륭한 것 같아요. 대개 TV나 연극무대에서 옮겨온 배우들이긴 하지만요. ^^
Commented by seal at 2005/04/23 22:26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글을 읽지 않으리라 생각했었고, 오늘 마침내 달콤한 인생을 보았기 때문에 이 글을 반만 읽었지. 그런데 감상 포인트가 비슷하네, 이런; 어차피 나야 단상에 가깝지만;;;;;

덧>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좋았던 건 이병헌의 귀여운 연기였던 듯.(으하하하하)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24 00:57
seal/ 김지운 감독은 아무래도 로리 취향인 듯하고, '땅에 사람 파묻기' 장면 찍기를 즐겨하나봐.아무리 그래도 난 퀴어쪽으로는 상상이 안되던걸.... ㅡㅡ;

혹시, 그거 알아? 이병헌이 팬티만 입고 샤워하러 들어가는 장면에서, 뒷모습 올누드 버전으로도 찍었대. 근데 물론 올누드 장면은 탈락. 이병헌이 "왜?"라고 묻자, 김감독 왈 한마디. "흉해서……." 여성 스탭들만 좋아라 했다나 뭐라나...
Commented by seal at 2005/04/24 12:47
장화홍련을 생각하면 로리설은 타당성이 있군; 아는 애는 김지운 발목 펫치라고;;; 왜 이번에 신민아도 발부터 등장하잖아. 꺾어지기까지 하면서;;;;;;;;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24 13:38
seal/ 이 덧글 대화는 아무래도 자네와 내가 스스로 무덤 파고 있는 것인 듯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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