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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때 그 사람들 : 우리들의 외롭고 웃긴 역사
한때 우리 코메디계에서는 바보, 도둑 캐릭터가 난무했었고, 우리 영화계에서는 조폭 영화가 판을 쳤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캐릭터가 판을 치는 이유를 '명예 훼손' 문제에서 자유로운 직업군(職業群)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며칠전 개봉한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감독)은, 한마디로, 정치군인들을 소재로 한 "조폭코메디" 영화다.

역시, 이 영화는 '정치군인'이라는 소재가 문제가 되었나보다. '정치군인'들의 후손, 혹은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 혹은 그들에 의해 심각하게 세뇌된 이들에 의해 "명예 훼손" 논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첫번째 씬부터 시커멓고 소리도 나지 않는 화면으로 시작하는 괴이한 영화가 되어 상영되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어떤 기자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보고 '역사에 대한 버릇 없는 태도' 운운하였다. 나는 예술가에게 있어서도 '역사'에 대한 엄중한 의식과 진지한 성찰은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정치 군인'들이 장악한 권력 내부의 역사에 대하여서만큼은 '버릇' 따위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명예 훼손'을 운운하는 이들에게 '정치군인'들로 인해 훼손된 국가와 국민의 명예를 회복시킬 고민부터 하기를 진심으로 권유한다. 그들 '정치군인'들은 어쩌자고, 우리 국가와 국가 권력을 이다지도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묘사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었는가 말이다. 이 영화가 코메디라면,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역사를 가볍게 다루었다면, 그것은 국가권력을 '장난'처럼 도둑질하고, 그 권력을 지나칠 정도로 가볍게 휘둘러댄 '정치군인'들의 책임이 무엇보다 1차적이다.

1997년 여름 개봉되었던 송능한 감독의 영화 "넘버3". 뜨내기 깡패 태주(한석규)는 하극상 쿠데타에서 도강파 보스(안석환)를 피신시킨 대가로, 조직의 '넘버3'가 된다. 그때부터 그는 넘버2 재털이 재철(박상면)과 사사건건 부닥치며, 라이벌 관계가 된다. 도강파 보스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던 조필(송강호)은 부하 세명을 데리고 지옥훈련을 벌이면서 '불사파'를 조직하고 복수의 칼을 간다.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의 호연과 송능한 감독의 재기발랄한 각본, 그리고 짜임새 있는 연출로 평단과 흥행 양쪽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블랙 코메디'이며, 이후 아류 '조폭 코메디'들이 쏟아져나오게 만든, 바로 그 영화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아니 실제 1970년대 말의 한국 정치 현실은 영화 "넘버3"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조폭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5.16 군사 쿠데타의 동지였던 1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인혁당 사건을 비롯하여 온갖 공안사건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4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그리고 북으로 건너가 김일성을 만나고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하는 한편, 유신 헌법의 기초까지 고민했던 6대 이후락, 법률전문가로서 온갖 '긴급조치'를 만들어낸 7대 신직수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보부장이란 자리는 박정희 군사 정권의 변함없는 '넘버2' 자리였다. 그러나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미수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종규 경호실장의 후임으로 육군 대위 출신 차지철이 경호실을 장악하면서, '부동의 넘버2' 자리는 다소간 위태로워지기 시작한다.

8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2기)생이었다. MBC 다큐멘타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VOD)를 보면, 김재규는 유신 직후, 자신이 3군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박정희를 연금시키고 하야를 강권하려하는 등, 7년전부터 거사를 생각해왔다고 한다. 또한 그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이나 김수환 추기경과 교류하면서 '민주화'와 '독재종식'에 대한 나름의 주관을 세워나갔다는 증언들로 볼때, 그가 "야수의 심장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거나 "10.26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말한 것이 단순한 '자기 미화'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가 유신 치하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장군에 대한 '충성경쟁'의 관계에 있었던 라이벌이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적어도 그가 10월 26일 당일을 '거사일'로 택한 것만큼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어왔던 것이 아닌 듯 보이는데다가, 박정희 개인에 대한 불만보다는 차실장의 월권행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 역시 분명해 보인다.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김재규는, 영화 "넘버3"의 태주(한석규)가 재철(박상면)과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게 되자 마동팔 검사(최민식)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여 보스를 검거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바로 그날 차지철 실장과 박정희 장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박부장(백윤식)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주과장(한석규)은 본래 '채홍사'로 불렸던 중앙정보부 박선호 과장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으니, 재판과정에서 김재규의 제지를 뚫고 박선호 과장이 박정희 엽색행각을 좀 더 폭로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 살아숨쉬는 박정희의 망령은 조금은 약화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찌되었건, 그의 증언(관련기사)으로 보나, 1970년 있었던 정인숙 사건을 떠올려보거나, 박정희가 주색(酒色)을 즐긴 것은 육영수의 사망 이후에 생긴 '외로움' 때문이라는 등등으로 미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박정희 장군의 아들 박지만 씨가 분명히 알아둘 것은, 최근 인터넷에 떠돌았던 '연예인 X파일'의 내용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실'로 인식되어 연예인들의 명예가 훼손된 데에는 바로 그의 아버지, 박정희 장군의 탓이 크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자가 연예인들을 불러다가 음주가무를 즐긴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아울러 앞에 링크를 걸어둔 '관련기사'를 보면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중년여인(윤여정)이 자신의 딸과 '각하'와의 로맨스를 운운하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장면이나, 박부장이 주과장에게 연회 준비를 지시하면서 "큰 걸로"라면서 "대행사(大行事)' 준비를 시키는 장면 등이 모두 상당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웃음을 자아낼만한 장면들, 가령 박부장이 총이 격발되지 않자 총을 찾아 허둥지둥거리는 장면, 박부장과 주과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중정 요원이 도망치려는 장면, 육군참모총장이 육군본부 앞의 위병에 의해 출입이 차단된 채 화가 나서 옷을 벗어제끼는 장면 등 역시도 재판과정이나 관련자들의 회고록을 통해 모두 '증언'된 내용들이다. 물론, 김부장이 총을 겨누며 "다카키 마사오"라고 외치는 장면, '각하'가 총에 맞고 나서 "한방 묵었다 아이가"라고 말하는 장면 등에 대한 구체적 증언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것마저 '허구적 창작'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영화에 "역사스페셜"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기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진실'과 '허구'에 대한 수준낮은 논쟁을 뒤로 하고, 이 영화를 하나의 "정치영화"로 돌이켜보자면, 분명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다. '사실'에 대한 강박관념만 떨쳐냈다면, 10.26 직전 실종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에 대한 의문을 다룰 수도 있었을테고, '극비촬영'에 대한 부담감만 없었더라면, 김재규가 목격한 부마항쟁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화면이 아니라 극으로 재현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속설대로 미국 망명후 박정희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던 김형욱이 끝내 차지철에 의해 제거된 것이라면, 김재규가 거사를 계획하고 결심하는 과정에 대해 좀 더 뚜렷한 '조폭형' 인과관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79년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 이후의 한미관계나 10.26 직후 주도면밀하게 권력을 장악해나가는 또 하나의 정치군인 전두환의 행보도 조금은 진지하게 다룰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코스타 가브라스나 올리버 스톤 식의 "정치영화"가 아니라 '조폭코메디' 못지 않은 "블랙코메디"를 만들려고 했다. 홍록기, 봉태규, 그리고 최동훈("눈물"의 조감독이자 "범죄의 재구성" 감독)에 이르는 깜짝 '까메오' 등장도 역시 그러한 의도에 따른 것일 테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사실문제'에 대한 강박관념은 "블랙코메디"라는 장르를 충분히 펼치기 어렵도록 만드는 제약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임상수 감독을 위한 일종의 변명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분명한 성과는 '정치군인'들의 "조폭적 행태"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효자동 이발사"의 황당한 도피와 몰역사성에 비해서는 훨씬 더 나은 방향을 잡은 셈이다. 그리 성공적인 '블랙코메디'라고 보기는 힘들지 몰라도, 적어도 방향성만은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사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피엔드", "바람난 가족", "얼굴없는 미녀" 등을 찍은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다. 그의 재능은 특히 좁은 공간 안에서의 카메라 워킹에서 돋보이는데, 절반에 가까운 장면이 '궁정동 안가' 주변에서 진행되는 이 영화의 특성상, 그의 재능은 한껏 발휘되었다. 반면, 가장 아쉬운 부분은 영화 후반부, 윤여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레이션'이다. 없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차라리 중반부를 좀 축소하고 관련자들의 재판장면을 '간략하고 코믹하게' 재현하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내가 영화를 본 CGV 극장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사 장면'과 '박정희 장례식 장면'은 검은 화면 처리가 아니라, 아예 "삭제"되어서 상영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나레이션이 더욱 뜬금없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미흡함의 상당부분은 제작 과정에서도 존재했을 '사실'에 대한 강박관념과 그에 근거한 사법부의 어이없는 검열과 삭제 탓이다. 다만 언젠가, 좀 더 자유롭게 정치사를 다룬 영화를 만난다면 그것은 역시 상당부분 지금 이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덕분일 것이다.

p.s.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최동훈 감독은 이번 영화로 '눈물', '바람난 가족', '범죄의 재구성'에 이어 벌써 네번째 까메오 출연이다. 이러다 진지하게 '배우 겸업'을 선언하는 건 아니겠지.

p.s.2. 이 글을 쓰는데에는 lunamoth님이 모아두신 자료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요 밑에 링크)

관련포스트 : [생각] 그때, 그 사람들 세 장면 삭제 판결
관련글 : 그때 그 사람들 "삭제판"을 보고
관련글 : [그때 그 사람들] 그때 그 영웅놀이
by 갈림 | 2005/02/06 19:37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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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달고양이 at 2005/02/11 23:36

제목 : < 그 때 그 사람들>은 쿨해지지 못했다
별로 해야할 이야기가 없다. 그동안 임상수 감독 영화를 모두 좋아해 온 터라 너무 기대치가 높았던 탓일까. 어쨌거나 걸작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좋은) 평가를 받아야할 것 같다. 이 영화가 걸작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 걸작임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나래이션의 뜬금없는 등장은 한 편으로는 참 유치하면서도 그동안의 비장한 분위기를 냉소적으로 바꾸는데 일조했다. 같이 본 부모님의 평가는 "김재규 바보 만드는 영화"였다. 명예훼손으로 상영가처분 신청을 했어야 하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유가족들이었을지도. 그만큼 ......more

Commented by ozzyz at 2005/02/07 09:54
단평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탁월한 글입니다 ^^ 이래저래 저는 너무 아쉬웠어요. 눈물 날 만큼이요. 어쨌든, 과연 내가 추천한 분의 글이라는... (쿨럭)
Commented by lunamoth at 2005/02/07 13:49
이번주 시사저널과 한겨레21(웹으로 봐도 될듯) 참고해볼만 하더군요. / 크레딧 편집 부분에 사법부를 올려놓는건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Commented by 갈림 at 2005/02/08 01:16
ozzyz/ 설날 선물치고도 지나친 과찬이시군요. *^^*;; 저도 후반부로 갈수록 아쉬움이 커지더군요.
lunamoth/ 한겨레21기사는 얼핏 본 듯도 한데, 시사저널 기사도 살펴봐야겠군요. '사법부에 의한 삭제'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는 것은 "센!스!!" 부족... ㅡㅡ;;
Commented by at 2005/02/14 19:25
이 영화 재밌어요? 재미없어요? 볼까 말까 고민중
Commented by 갈림 at 2005/02/15 00:18
ㅁ/ 기껏 감상평 써두었더니, 재미 여부만 묻는, 저.... (버럭)
근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재밌다.
주변 맥락을 하나도 모르는 10대들만 아니라면.
Commented at 2005/02/1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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