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8일
[리뷰]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가 돌아왔다. "모노노케 히메" 이후, 그가 은퇴한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이미 60이 훌쩍 넘은 그의 나이로 볼 때, 언제가 마지막 영화가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시점에서, 그는 아흔 살 노파로 변해버린 소녀의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서 "마녀배달부 키키"를 거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의 필모그래프를 채우고 있는 영화들중 적지 않은 수가 '여성탐험담'이었다. 영화 속 소녀들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혹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 혹은 마법에 의해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고, 마치 '롤 플레잉' 게임의 주인공처럼 그녀들은 '남성'을 능가하는 배짱과 용기로 역경을 헤쳐나간다. 이번엔 바로 그 여인이 아흔살 노파인 것이다.

이번에 미야자키는 오랜만에 원작 동화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영국의 아동문학가 다이애나 윈 존스가 쓴 원작 "Howl's Moving Castle"에 푹 빠져든 미야자키는 이것을 만화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5년만에 그 결과를 세상에 내놓았다. 미야자키는 원작 동화의 설정과 캐릭터들을 사실 '생각보다는' 많은 부분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다. 성이 움직인다는 설정, '캘시퍼'나 '무대가리'와 같은 캐릭터들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의 '성(城)'이 전형적인 고딕풍의 성을 연상시켰던데 반하여 미야자키가 고안한 '움직이는 성'은 산업혁명 무렵 공장과 기관차들을 해체, 조립한 모습을 띤 그야말로 괴상한 모습이었다. (좌측 원작 표지의 성과 우측 미야자키가 고안한 모형을 거쳐) 결국 완성된 성의 모습은 아날로그적 기계 문명의 상징물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경고 : 이하 스포일러 일부 포함되어 있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하울'이라는 캐릭터의 변화이었을지도 모른다. (좌우측에 보이는) 여러 버전의 원작 소설의 표지에서 볼 수 있는 캘시퍼와 하울의 이미지는 미야자키가 만들어낸 캐릭터들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하울은 역대 어떠한 미야자키 '남성주인공(Hero)'들보다도 뛰어난 '꽃미남'이다.영어로 '하울(Howl)'이 '개나 늑대 따위가 짖는 소리를 흉내낸 의성어'이거나 전화기에서 흔히 하울링이라고 말하곤 하는 '소음'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의 아름다운 미소년 이름으로는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원작자는 시끄럽게 움직이는 城의 소음을 연상시키는 의미로 '하울'이란 이름을 명명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미야자키가 소녀, 혹은 노파의 탐험담에 '하울'이라는 미소년을 등장시킨 것은 이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지브리 사상 최초의 키스신까지 등장할 정도로 로맨스를 강조한 이번 영화에서 미야자키가 하울의 외모를 아름답게 그려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무라 타쿠야를 성우로 쓸 만큼 철저한 상업적 전략에 의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왜? 사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여주인공(Heroin)이 아흔 살로 늙어버린 노파임을 떠올린다면, 이건 로맨스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영화로 볼 수가 없다. 앞뒤가 맞지를 않는 것이다. 대체 왜, 아흔살로 늙어버린 소녀의 이야기라는 컨셉을 영화하면서, 평소 잘 다루지 않던 '진지한 로맨스'를 다루고, 게다가 남자주인공은 지나치리만큼 예쁘게 그려놓은 것일까? 애초 원작에서 가져온 핵심 포인트는 '꽃미남'이 아니라 '늙어버린 소녀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이와 같이 의아한 지점은 이 영화에서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18살 소피의 가족은 거의 붕괴된 상태인데다, 심지어 나중에 소피의 엄마는 늙어버린 소피를 다시 찾아와 흉계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결말부에서는 '움직이는 성' 안에서 할머니(황야의 마녀)-부모(하울과 소피)-아들(마르클)로 구성되는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기도 한다. 가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혼란스럽다.
또, 영화의 스토리 전개의 단초는 '마법'에서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마법'의 의미는 가끔씩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곤 한다. 할머니가 되는 저주에 빠진 소피는 성에서 마주친 '캘시퍼'나 왕을 만나러 가다가 다시 만난 '황야의 마녀'에게는 저주를 풀어달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하울 앞에서는 그러한 희망을 내비치지 않는다. 괜시리 소피에게만 자신의 계약을 풀어달라고 조르는 캘시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해되지 않는다.
소피는 늙은 몸이 이렇게 뻣뻣한 것인지 몰랐다고 토로하다가도 늙으니 놀랄 일이 없어 좋다고 말한다. 정작 그러면서 '성'을 청소하면서부터는 꼿꼿한 허리와 젊은이 못지 않은 힘을 가지게 되었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성'의 출구와 하울의 변화한 모습에 수없이 자주 놀라고, 또 호기심을 갖는다. 또한 소피는 처음에 하울의 소심함을 질타했지만, 나중에는 하울은 비겁한 게 차라리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움직이는 성'을 일부러 파괴했다가 금세 다시 성의 재건을 꾀하기도 하는 변덕도 드러낸다.
이 정도면, '환타지'와 '만화'라는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앞뒤가 심하게 안맞는 '낭패'스러운 내러티브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심함 때문에 설리반 선생에게 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소피를 대신 보냈던 하울이, 왕의 모습을 하고 설리반 앞에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영화 속 '소피'마저도 "그럴거면 진작 직접 오지 그랬냐?"고 의문을 제기할 정도이다.

미야자키가 태어났던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해였다. 전쟁을 태생적으로 증오하는 미야자키는 "코난"에서부터 꾸준히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았고,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다소 노골적이다 싶게 '반전'의 의미를 전하려 한다. 대개의 '전쟁 피해'는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폭탄"에 의해 발생하곤 한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 걸쳐 반복되어 드러나듯 '비행'에 대한 자신만의 환타지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는 '병기 마니아'라 할만큼 무기들에 대한 관심도 많은 사람이다. '비행'과 '무기', 그리고 '전쟁'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태도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미야자키에게는 적지 않이 혼란스러울 수 있었던 국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나 "모노노케 히메"를 비롯해 많은 작품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평화로운 교감", 혹은 "생태주의"를 또한 매우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서는 무조건 악한 '인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반해, '무섭고 흉악한' 자연물의 모습은 자주 발견된다. 자연재해가 워낙 많은 일본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본래 '토템'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더라도, 항상 신앙은 '무섭고도 존경스러운', "이중적 존재"에게 향하기 마련인 법이다.
캘시퍼로 상징되는 '불'은 바로 그러한 전형적인 존재이다. '움직이는 성'으로 상징되는 모든 기술문명은 "캘시퍼"로 상징되는 '불'에 의해 발전되고 유지된다.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는 것 역시 "불", 혹은 그것을 이용한 "전쟁"이다. 영화에서 캘시퍼는 스스로 '불의 이중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웃집 토토로"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보다는 서구 사회를 배경으로 삼곤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거치며 '일본적인 것'으로 빠져드는 듯 하더니, 다시 '서구 세계'와 '문명'의 문제로 방향을 돌린 영화가 바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미야자키는 늘 서양의 세계를 동경하는 듯한 그림을 그려왔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비판도 받아왔지만, 그가 그리는 서구는 시대와 국적을 알 수 없는 모습을 가졌다. 비행선이 날아다니고 기차가 다니지만 길거리에 자동차는 다니지 않는 곳. 복잡한 기계장치에 의해 '성'은 움직이기도 하고 목욕탕에 온수까지 공급하기도 하지만, 청소기나 세탁기는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러한 모순된 공간이 미야자키가 그려낸 공간이었다.
세상은 무 자르듯,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됨과 이중성이 가득한 곳이 바로 우리들이 사는 세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미야자키는 어쩌면, 젊은 시절 생각했던 것만큼,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이 분명하고 뚜렷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해도, 혹은 내가 그 입장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고 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허술한 내러티브가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해도, 미야자키가 그려낸 '전쟁 속의 사랑'에 대한 이 놀라운 환타지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이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음을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 by | 2004/12/28 22:30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1) | 덧글(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제목 :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 열성팬들은 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대해서 아주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나야 애니메이션에 광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하야오의 열성분자도 아니기에 별관심도 없던 차였는데 후배에게 사소한 베품(?)을 한 댓가로 이영화를 챙겨보게 되었다 유럽풍의 배경에 동양적인 얼굴이면서 묘하게 서양적인 그 캐릭터들입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어는 색다름을 주었다 황야의 마녀의 마법에 걸......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