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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후배 강모군이 원고료 한푼도 주지 않으면서 느닷없이 청탁(?)한 것을 계기로 작성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무렵, 나는 '뉴욕 양키스'의 팬이었다. 아니, OB 베어스도, 삼성 라이온즈도, 심지어 해태 타이거즈나 삼미 슈퍼스타즈도 아닌, '뉴욕 양키스'라니!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무슨 잘난 척 한다고 미국 메이저리그 팀을 좋아했다는 말인지, 의아해할 법도 하다. 사실 메이저 리그 경기는 단 한번도 본 적도 없는 꼬마 아이가 '뉴욕 양키스'를 좋아한다는 것은 웬만한 '겉 멋'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1982년 프로야구 첫 시즌의 첫 리그, 그러니까 전기리그가 끝났을 당시 나는 어머니를 졸라 "프로야구"라고 하는 제목의 책을 사서 읽었었다. 사실 그 책은 어린이용은 아니었지만 나의 흥미를 끌만한 부분은 너무나 많았다. 책의 뒷편에는 6개 구단 선수단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모두 실려 있었고(덕분에 나는 '삼미슈퍼스타즈'의 감사용이니 인호봉이니 금광옥이니 하는 이름조차 특이했던 그 '슈퍼스타'들을 박민규의 소설과 이범수 주연의 영화 이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에 야구가 도입되었던 시절부터의 역사도 수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흥미를 더욱 끌었던 것은 "프로야구"의 본고장 미국 프로야구의 역사와 주요 선수들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일대기, 종종 홈스틸까지 감행할 정도로 발이 무척 빨랐던 타격왕 타이콥의 이야기, 연속경기 안타 기록을 갖고 있었던 조 디마지오와 마릴린 몬로와의 사랑 이야기 등등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베이브 루스가 "뉴욕 양키스"에서 3번타자일 때, 4번 타자였던 '루 게릭'의 이야기였다. 베이브 루스가 한 시즌 60홈런을 기록했던 1927년 MVP를 수상한 것도 밤비노가 아니라 루 게릭이었고, 칼 립켄 주니어가 그의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최다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던 '원조 철인'도 바로 루 게릭이었다. 하지만, 1루수였던 루 게릭은 어느날부터인가 쉽게 잡을 수 있는 공을 수시로 떨어뜨리곤 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 병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앓고 있는 바로 그 '근육위축증'이었는데, 당시에는 정체조차 알 수 없는 기괴한 병이었고, 그 병에 걸려 은퇴한 '루 게릭'의 이름을 따서 아직도 그 병은 "루 게릭씨의 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면서 그는 스스로 연속 출장 기록을 포기하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루 게릭이 마지막 은퇴식에서 "지금 이순간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연설한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그때 아마도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물론, 나는 83년부터는 얼떨결에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되었고, 또 요즘은 뉴욕 양키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당시의 나는 루 게릭이 사랑했던 팀 '뉴욕 양키스'의 팬이 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도 루 게릭 못지 않게 감동적인 은퇴식을 치른 선수가 있다. 바로 박철순이다. 박철순은 나의 모교인 '배명고' 출신이었다. 당시의 박철순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선생님들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재능에 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 한번도 당시 우승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하곤 했다. 박철순은 사실 운이 좋은 선수였다. 연세대로 진학 후 상무로 입대했던 그는 1978년 당시 한국 성인 야구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을 대신하여 쿠바와의 국제 경기 선발 투수로 등판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물론 그보다 2년전인 1976년 최동원이 쿠바와의 경기에 뭇매를 맞았던 것도 그가 등판하는 기회를 잡은 계기가 되었겠지만, 사실 당시 최동원이 부상중이었던 탓이 더 컸다고 한다. 78년 당시 상무(공군) 소속이었던 박철순은 쿠바를 6대3으로 이기는 경기의 승리투수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쿠바는 아마야구의 최정상이었고, 자연히 쿠바을 꺾은 주역 박철순은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선수가 되었다. 1979년 연세대 복학 후, 역시 최동원을 대신하여 한미 대학야구 친선경기에 선발출장했던 박철순은 결국 한국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독일 프로축구 리그에 진출한 차범근과 더불어 한국 스포츠의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차범근의 경기가 MBC TV를 통해 하일라이트로 안방으로 전달된 반면,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던 박철순의 미국에서의 활약 내용은 (당연히) 지금까지 자료화면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박찬호나 최희섭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박철순이 마이너리그 싱글 A에서 트리플 A까지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 선수'로 변모했을까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트리플A에서 메이저리그 승급을 눈앞에 두고 있던 박철순은 한국으로의 복귀를 결심한다. 프로스포츠에 대한 '정보'와 '인식'이 전무했던 당시, 거의 우격다짐식으로 '이적료'조차 건네지 않은 채 박철순은 한국 프로야구팀으로 합류한다. 당시 OB의 연고지는 대전이었으나, 그것은 대전 연고의 프로팀이 생길 때까지 임시로 머문 것일뿐, OB는 MBC와 함께 서울을 연고로 하기를 희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 출신의 선수들에 대한 지명권은 MBC와 OB가 2:1로 나눠 갖기로 결정됐고 MBC는 당시 최고의 1번 타자 이해창과 실업야구 7관왕에 빛나는 김재박을 지명했었고(이 두 선수는 세계선수권 참가 때문에 83년에야 프로에 합류한다), OB는 미국에서 활약중이라는 '소문만 무성'한 박철순을 1차로 지명했다. 지금도 '두산'의 골수팬들은 스스로를 'OB'팬이라 하고, 그리고 또 'OB'는 곧 '박철순'이며, '박철순'은 곧 'OB'라 말할 정도로 깊고도 깊은, 그 인연은 그렇게 맺어지게 된 것이었다. ![]() 역설적이지만 박철순이 가장 감동적인 은퇴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가 가장 힘겨운 역경을 가장 많이 헤쳐온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 역경의 시작은 82년말부터 시작된다. 82년 9월 14일 잠실에서는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과 함께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극으로 기억되는 한일전을 승리로 이끈 국가대표팀이 세계 정상에 올랐고, 대회기간 동안 잠시 중단되었던 프로야구는 그후 다시 속개되었다. 9월 18일 롯데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박철순은 원래 2차전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첫 경기 1:1 상황에서 8회에 등판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9회 롯데 김용철에게 결승타를 허용한 박철순은 연승기록을 22경기에서 끝맺게 되었다. 그 아쉬움이 잦아들기도 전인, 82년 9월 29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전에서 번트 수비를 하던 박철순은 허리를 '삐끗'한다. 하지만 고통을 참아가면서 10월에 열린 한국시리즈까지 공을 던진 박철순은 끝내 OB에 원년 우승의 감격을 안겨주었다. 완치가 안 된 상태에서 전지훈련을 떠난 박철순은 83년 2월 다시 허리 통증이 재발되는데, 이번엔 '요추부 간판헤르니아(디스크의 일종)'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당시 언론에서는 OB측에서 다른 팀들을 경계하기 위해 지어낸 '엄살'일지 모른다고 하기도 하였지만, 박철순은 이 기사를 보며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1983년 내내 3경기에 등판하였을 뿐 재활훈련에만 힘쓰던 박철순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시즌 막판이었던 9월 22일 MBC전(잠실구장)에 선발투수로 등판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박철순 복귀'에 환호하던 팬들의 함성이 잦아들기도 전인, 1회말 MBC 4번 송영운 선수의 타구를 허리에 맞고 박철순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만다. 이번엔 미국 LA로 치료와 재활을 위해 떠난 박철순은 84년 4월 귀국하지만, 그의 '놀랍도록 빠른 귀국'에 기뻐하던 팬들은 돌아온 그의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도한 약물 치료로 인하여 심각한 탈모증세를 동반한 후유증까지 앓게 된 것이다.비관적인 주변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85년 1승 4패라는 그다지 좋지 못한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차츰 재기의 꿈을 키워나갈 무렵, 그에게는 또다시 위기가 닥친다. 그해 9월 번트 타구 연습 도중 허리 통증이 재발되면서 세번째 재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가 그의 주변을 온통 빚잔치로 장식해놓았던 부인마저 그를 떠나고, 그는 고통스러운 재활 훈련에 다시금 매진한다. 1986년 5월 25일 롯데전에 완봉승을 거두면서, 그는 또한번 '화려한 부활'에 성공한다. 그는 이때부터 "불사조"라는, 어쩌면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게 된다. 싱크로나이즈스위밍 코치 출신인 두번째 아내를 만나 재혼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부상의 순간이 다시 그를 찾아온다. 1988년 3월 '불사조'의 이미지로 인기를 회복한 그는 CF 촬영에 나섰다. 높이 점프했다가 발을 딛는 장면에서, 그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것이다. 수많은 부상을 경험했던 그였지만, 그때만큼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다고 했다. 병원으로 실려가는 내내 그는 아프다는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냈다고 한다.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끊어져 그것을 이어붙이는 수술을 받아야했고, 또 그렇게 했지만, 다친 쪽 발의 아킬레스건의 근육은 반대편 발 근육보다 2-3cm 짧아진 채로 이어붙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주위 사람들은 '선수로서의 부활'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 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를 염려했다. 실제로 박철순은 한동안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조차 혼자 힘으로 다녀올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었다고 한다. 모두들 이제는 '불사조도 끝'이라고 했다. 그는 OB측에서 제안한 은퇴와 함께 코치직을 맡는 것을 수락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는 재활훈련으로 다친 쪽의 근육을 다시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88년 한해를 재활을 위해 보내게 된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989년에는 '코치 겸 선수'로 다시 경기장에 복귀하여 12경기 등판, 1승 1패를 기록한 것이다. 1990년에는 4승 9패를 기록하였고, 특히 그해 7월 5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전에서 그는 조계현과 맞대결을 펼치며 1500일만에 5-0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후 91년부터 94년까지 매년 7승씩을 거두며, "불사조"의 부활을 분명히 한다. 그무렵, OB팀의 성적은 사실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때 투수 교체를 하러 감독이 마운드로 다가서면, 관중들은 아무 때나 '박철순'을 연호했고, 가끔씩 정말로 '박철순'이 구원투수로 등판하면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 응원'을 펼치곤 했었다. 그리고 더 가끔 '박철순'이 선발투수로 예고된 날이면, 잠실야구장에는 "My Way"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를 보기 위해 평소의 몇배는 되는 팬들이 경기장에 모여들곤 했었다.그는 1996년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그는 “최고령”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온갖 기록은 모조리 경신하였다. 최고령 완봉승 기록 (38세5개월), 최고령 승리기록 (40세5개월), 최고령 세이브 (40세4개월),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은 모두, 그 시기 그에 의해 세워진 기록들이었다. (최고령 완투승 기록은 2004년 송진우 선수에 의해 새로 세워졌다.) 하지만, 사실 그의 역경 이야기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OB가 매년 바닥에 가까운 성적을 거듭하고 있던 1994년 당시 OB의 감독은 원년 우승 동료 윤동균이었다. 1994년 9월 4일 꼴찌 다툼을 벌이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원정경기에서 패배한 뒤, 윤 감독은 몽둥이를 들고와서 선수들에게 '체벌'을 가하려 하였다. 이때, OB팀의 고참선수들은 체벌 거부 의사를 밝혔고, 윤감독은 그럴 거면 당장 사라지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박철순을 비롯한 김형석, 장호연, 김상호, 김상진, 권명철, 이광우 등 고참급이자 핵심 선수들 17명이 집단으로 팀을 이탈하고 감독 교체를 요구했다. 며칠간의 소동 끝에 구단측에서는 윤동균 감독과 박철순, 김형석 등 주동 선수 5명이 동반 퇴진(은퇴)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하지만 팬들의 반발이 이어졌고, 결국 강영수 선수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은 모두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하지만, 윤동균과 박철순은 이 사건을 아직도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선수로 다시 뛸 수 있게 된 박철순과 김형석은 95년 구단에 '백지 연봉 위임장'을 제출하고 선수단의 분위기를 추스렸다. 그 효과를 본 것인지, 새로 임명된 김인식 감독이 이끌고 김형석, 김상호, 김상진, 권명철, 강병규 등이 주축이 된 OB 베어스는 1995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박철순은 그해 시즌 9승을 거두며, 원년 이후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두어 팀의 정규시즌 우승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특히 만 39살이 훌쩍 넘은 박철순이 10월 20일 한국시리즈 5차전에 등판하자, 야구장은 온통 감동과 환호의 물결이었다. 결국 95년 OB 베어스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그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선수는 다름 아닌 박철순이었다. 1996년 9월, 만 40세 5개월의 나이로 '승리투수'가 되는 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그해에 박철순은 시즌 2승 6패로 다소 부진한 성적을 낸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렵 개봉한 김태균 감독의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에는 명배우 명계남의 명대사가 등장한다. 택시기사 역할로 특별출연한 그의 대사는 이러했다. "어느 팀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OB를 좋아합니다. 박철순이 있기 때문이죠. 저는 세상에는 딱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철순을 좋아하는 사람과 박철순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박철순, 대단한 사람이죠." 박철순이 '신화'의 주인공이 되어갈 바로 그 무렵, 그는 이제 은퇴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 박철순은 끊임없는 부상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1988년 단 한 해를 제외하곤 매년 마운드에 올랐었다. 그의 통산 기록은 231경기 등판, 76승 53패 20세이브, 방어율 2.95다. 박철순은 은퇴후 OB 2군 투수코치를 맡았지만, 오래지 않아 2군 주장 선수가 후배들을 체벌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문제를 일으킨 주장 선수를 옹호하다가 구단과 갈등을 빚고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이후 스포츠신문 논평위원, iTV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현재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두산팬'이라기보다는 'OB팬'이며 '박철순의 팬'인 많은 이들은 '박철순'이 '베어스 유니폼'만 입고 덕아웃에 앉아만 있어도 경기장을 찾아가겠다며 '박철순 코치'나 '박철순 감독'을 경기장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참고사이트 : http://phoenix.nalove.org  '나의 불사조'라는 카테고리를 갖고 있는 네거티프님의 네이버 블로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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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고교인 상문고하고 같..by 이동준 at 08/24 김상윤/ 그러셨군요. .. by 갈림 at 07/14 훗 저거 세개 다 타봤습.. by 김상윤 at 07/08 아우라/ 예, 반대하는 .. by 갈림 at 06/03 마지막 '긴호흡'이라는 .. by 아우라 at 06/02 조군/ 네 ^^ 감사합니다. by 갈림 at 06/02 트랙백 신고합니다. ^^ by 조군 at 06/01 역시 잘못한 거였어. 다.. by seal at 05/29 seal/ 맞는거 아냐? (2) .. by 갈림 at 05/27 한가운데 學이 세 개. .. by 사막여우 at 05/27 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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