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IMF의 여진이 여전하던 2000년 초 프로야구 선수들이 선수협의회를 결성하려고 하였을 때, 일각에서는 그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연봉 수억원짜리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박정태, 강병규 선수 등이 주도하고 있었던 "프로야구 선수들의 이익단체"다보니,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수억원짜리 선수들이 대체 왜 노조를?"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선수협은 "노조"가 아니며, 지금은 주장들의 모임처럼 변질되어 상당부분 협상력과 영향력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어처구니 없는 "노조" 논쟁이 벌어졌었다.

당시 정운영씨가 진행하던 100분 토론에 출연한 KBO 이상일 사무총장은 송진우 당시 선수협 회장에게 "선수협이 노조 아니냐?"고 물음을 던졌다. 송진우 선수는 "현재는 그저 협의회일 뿐"이라고 대답했는데, 이상일 총장은 "자신은 협의회가 노조라고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몇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회원을 가입시킬 때 은밀하게 가입을 시켰다.
둘째, 정당이나 시민단체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힘으로 일을 해결하려 했다.
셋째, 회원을 가입시키기 위해서 납치 등의 만행까지 저질렀다.
넷째, 자신들만이 대표성이 있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선수협 = 은밀하게 조직을 만들어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놈들 = 노조"라는 놀라운 삼단 논법이 저 엄청나고도 뻔뻔한 발언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상일 사무총장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는 "노조 = 빨갱이 = 식충이들" 정도의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선수협을 주도한 바 있었던 마해영 선수가 최근 프로야구 경기수를 늘리자는 논란과 무승부 제도와 관련된 논란 등에 대하여 몇 마디를 던졌는데, 스포츠투데이의 보도를 종합하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선수들은 솔직히 경기수가 적은 게 좋습니다. 연장전 안하고 무승부하면 좋지요. 하지만, 후보 선수들, 2군 선수들에게 출전 기회가 돌아가려면 경기수는 더욱 늘어나야 합니다."

선수협이 출범 당시 "억대 연봉 선수들의 과욕"이라는 오해를 벗어나,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억대 연봉 선수들이 자기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2군 선수를 비롯한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 더 나아가 모든 스포츠 선수들의 권익을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라는 것은 본래 이익단체이기 마련이다. 당연히 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다. 노조는 은밀한 간첩 조직이나 빨갱이 집단이 아니라, 자본가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구조인 '자본'주의 국가(고로 자본가들의 권익은 따로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에서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단체"다. 1970년 11월 13일 당시 23살의 청년 전태일이 온몸을 불살랐던 것은 "노조"라는 것이, 그리고 노동자의 권익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주장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임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월요일부터 전국공무원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었다. 워낙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이 부담으로 작용했던데다가 여론마저 여의치 않은지라, 당초의 계획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의 파업이 진행되었고, 반나절도 못가서 상당수가 대오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결국 전공노는 3일만에 파업 종결을 선언하고 "투쟁은 계속될 것"을 천명하였다.

이번 전공노의 파업은 몇가지 실책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단, 타이밍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이밍이 적절치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파업이 시기상조라는 의미가 아니다. 대통령 탄핵사태와 총선 등의 일정이 결국 현 시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했겠지만, 굳이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노동자 대회날'로 파업 시기를 일치시키려고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조금 더 빨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보다 더 중요한 실책은 노동3권 보장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동절기 단축근무", "점심시간 준수", "연금문제" 등을 동시적으로 이슈화하면서(혹은 그것들이 이슈화 되면서) 결과적으로 여론만 극도로 악화시켰다는 점이다. 전공노 파업의 유인물을 보면 "공무원은 사실 철밥통도 아니며, 편한 직장도 아니며, 연금혜택도 형편없이 축소되었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아무리 그렇게 주장하더라도 "40세 정년"이 일반화된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그런 주장은 일반 노동자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할 뿐이다. 공무원이 개별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자가 아니라, 국민이 (허울뿐인) 주인인 국가에 소속된 노동자라는 점에서 "여론의 확보"는 옵션이 아니라 필수적 과제였음에도 그 점을 소홀히 한 지도부의 실책은 너그럽게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오히려 공무원이 노동3권을 보장받게 되고, 노조가 생기게 되면, 공무원 사회 내부의 썩은 관행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홍보했어야 했다. 본격 파업 이전에 점심시간을 엄격히 준수하는 "준법투쟁"을 일부에서 실시했던 것은 그야말로 "실책"이었다. "100억의 투쟁기금"을 모아서 싸우겠다는 투쟁전략도 '여론'은 고려하지 않은 전략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공노 파업의 전략상 실책은 실책이고, 그들의 요구나 그들 파업 자체의 부당성을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공무원이라고 노동자가 아닌가. 생계를 위해 직장으로 출퇴근하여 급여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노동자가 아니라면 누가 노동자란 말인가. 노동자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부당한가. 노동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란 말인가.

전공노 파업이 시작되던 지난 15일 대법원은 아시아나 항공의 '조종사 노조'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한 기업 내에서 근무형태가 다른 두 노조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연봉이 수천만원이 되더라도 '조종사'도 역시 '노동자'이며, 당연히 '노조' 결성이 가능함을 "대법원"이 법적으로 인정한 결과였다. 그리고 어제(18일) 서울행정법원은 대학 시간강사들도 역시 생계를 목적으로 '강의'라는 노동을 제공하는 '근로자(노동자)'임이 당연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공무원'도 분명 노동자이고, 그들의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함 역시 당연하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의 주도하에, 그리고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으로 인하여 '전공노'의 파업은 "불법파업"이며, 그들은 파렴치한 "귀족노동자"로 색칠되고 말았다. 그런데, 물론 언론과 정부의 탓도 있겠지만, 이번 사태를 접하는 서민 민중들 다수가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라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서민 민중들의 의식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다들 공무원 짤려라! 내가 공무원 하면 되지!"라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서민 민중들의 머리속 가슴속 깊은 곳까지 자본주의가 뿌리 깊숙히 자리잡게 된 것은 지난 IMF를 겪으면서였다. IMF 무렵, 많은 이들이 금붙이를 꺼내 모으고, 자신의 직장을 잃어 고통받을 때, "있는 놈"들은 헐값이 된 부동산 주식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매우 뼈저린 것이었다. 더욱이 그때 큰 돈을 번 사람들은 "재벌"들이 아니라(물론 재벌들은 더 큰 돈을 벌었겠지만), 조금 더 안정적인 직장이나 직업을 가진 "조금 더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즘 중소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부도위기를 어렵사리 넘겨가고 있는 자기회사 사장과 돈 많이 버는 전문직 종사자나 고액연봉자 가운데, 그 누구와 심리적인 "계급 격차"를 느낄까. 아무리, "노동계급"으로 묶으려해도 이미 "노동계급"은 이전의 잣대로 볼 수 없을만큼 크게 분화되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당시에 비해, 자본주의는 훨씬 더 괴물이 되어 갔고, 자본가 노동자의 계급 구도는 훨씬 더 분화된 것이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이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과 이번 공무원 노조의 파업에 그처럼 뻔뻔할만큼 강경 대응하고 있는 이유는 그 정권이 "반 노동자적"이어서라기보다는, "노동 계급" 자체의 분화와 갈등의 골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라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주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 타당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다. 어차피 재화가 한정된 사회에서 누군가 조금 더 가져가면, 내 몫이 줄어들 수 있음은 사실 당연하다. 고로 비교적 여유 있어 보이는 누군가가 더 많은 이익을 요구할 때, 그것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음도 당연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결코,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을지로 지하상가에 라면박스로 올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있는, 점점 더 늘어만 가는 '노숙자들'의 심리라면,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시즘의 세례를 충분히 받았던 80년대 후반 이후 학번들이, 일반화된 "연봉제 계약"에 익숙해져 노조의 필요성조차 제기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스스로 '노동계급'이라고 여기지도 않으며, 하지만 사실은 "노동자"로 살아가는 요즘, 그러한 그들이 "노동자"를 자처하고 투쟁을 시작한 "공무원"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적절치 않다. 자신이 누군가를 향해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도 역시 누군가에겐 "부족하지 않은 그들"로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누군가를 "대체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라는 의문으로 바라보는 순간, 이 세상의 더럽고 불결한 질서와 위계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게 될 것임도 기억해야 한다. 2004 나의 블로그 톱10

by 갈림 | 2004/11/19 14:21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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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늘 갈림길, 한 걸음 더 at 2005/08/01 22:46

제목 : [단상] 아시아나 항공 조종사 파업
아시아나 항공 조종사들 파업에 대한 비난 여론이 뜨겁다. 뒤늦게 해명하긴 했지만, 여당의 노동 정책을 담당하는 이목희 의원이 '고액 임금 노동자의 노동 3권의 일부를 제한할 것을 검토'하겠다는 발언을 했을 정도로 이번 파업에 대한 여론은 아주 좋지 않다. (여론이 좋았던 파업도 있었던가?) 이달 초에 시한부 파업을 할 때에도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았기에, 설마 파업 강행까지 가겠느냐는 예측이 많았으나, 결국 파업 상황을 맞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파업을 했을까? 일단, 이번 조종사 노조의 파업에 대한 비난은 일정 ......more

Commented by youngjune at 2004/11/19 22:01
저 첫번째 사진의 맨 좌측 인물, 요즘엔 쇼프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강병규 아닌가....
저당시만 해도 선수협 대변인으로써 의식있는 듯 했는데...
Commented by 갈림 at 2004/11/20 03:26
그렇지! 강병규가 선수협 모임에 나와있는 사진을 의외로 찾기가 힘들더군. 강병규는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탓에 선수 생명이 앞당겨 끝난 대표적인 인물이지. 물론, 개인적 능력(외모나 말발)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겠지만...
Commented by youngjune at 2004/11/20 14:45
근데 사진을 보니 야구선수들 의상이 왜그렇게 조폭들 같냐~ ㅡ,.ㅡ 깍두기 머리까지....
Commented by 갈림 at 2004/11/20 21:42
박정태 형님의 포스가 워낙 강력해서 그렇겠지?
강병규는 뭐 그냥 삐끼 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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