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11일
자크 데리다(1930-2004) 타계 소식
지난 9일 데리다 선생이 파리의 한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데리다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워낙 잘 알려진 바.
민음사에서 대우학술총서로 출판되었던 그의 저서 "그라마톨로지"는 들뢰즈의 "앙티 오이디푸스"와 더불어 오역이 가장 많고도 심한 것으로 소문난 책인데, 그렇다고 그의 원저를 제대로 읽어낸 사람도 거의 없는 듯하니, 그의 죽음을 맞이하여 데리다 철학을 새롭게 조명해보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나라에선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쓴 김형효 선생만이 데리다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비교적 쉽게 전달해줄 수 있는 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데리다가 워낙 난해해서일까.
데리다의 타계 소식을 전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대부분의 언론 보도에는 데리다의 대표저작으로 "차이와 반복" 등을 꼽고 있는데, "글쓰기와 차이"가 데리다의 저작이고,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주저 가운데 하나다. 한겨레, 중앙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세계일보, 국민일보, 서울경제, 매일경제 등이 이 어이없는 오류를 반복했다. 짐작했겠지만, 원인은 '연합뉴스'가 제공한 보도에 애초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저 언론들은 연합뉴스 인용 기사로 처리하지도 않고, 이것저것을 짜깁기 한 다음 뻔뻔하게 기자의 실명이 적힌 '기명기사'로 보도를 하였단 말이다. 사실 연합뉴스의 오류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 기사를 보면 데리다가 저서 "수백권"을 남겼단다. 아니, 아무리 데리다가 다작을 했기로 어떻게 철학자의 저서가 '백여권'도 아니고 '수백권'이 된단 말인가? 아마도 짐작컨대 이건 외국 통신사의 보도에 논문을 포함 논저 '수백편'이라고 된 걸 '수백권'으로 둔갑시킨 것이리라. 적지 않은 언론사들은 이 부분 역시 그대로 베껴대고 있다. 오바질 하느라 프랑스 파리 특파원의 이름으로 기사를 낸 서울신문과 특파원에다가 학술전문기자까지 동원한 중앙일보의 보도를 보면, 웃음만 날 뿐이다. 그나마 한국일보는 후속 보도에서 데리다 철학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오류를 바로 잡았다. 내가 찾아본 바로는 동아일보 기사, 연합뉴스 기사의 오류 부분을 빼고 인용한 경향신문 기사(하지만, 역시 연합뉴스를 베낀 가짜 기명기사다), 그리고 르 몽드를 인용한 특파원 기사와 김상환 교수의 해설을 함께 실은 조선일보 기사만이 그 어이없는 실수를 피해갔다. (아~~ 젠장! 조선/동아 외의 타신문 기자들이여, 제발 정신 좀 차리고 공부 좀 하시게들~. 모르겠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든가! 이래서야 어디 조선/동아를 맘놓고 욕하겠는가 말이다. ㅡㅡ;;)
그 놈의 기자들 때문에 데리다 선생을 추모해야하는 이 엄숙한 순간에 괜히 흥분을 했다. 후설과 하이데거, 니체 그리고 소쉬르,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19세기의 철학 사조들을 아우르며, 새로운 철학을 열어제낀 데리다. 그는 시종 선입관에 사로잡힌 사유방식과 이성중심적 서구철학의 전통을 공격해왔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던 그가 현실 세계의 바깥으로 사라진 이 순간, 그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하고도 너무나 난해한 '텍스트'들을 남겨놓았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저서는 아니지만, "테러 시대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아직 생존해있는 대(大)철학자로 데리다와는 상반된 입장을 견지해온 하버마스와 데리다, 각각의 인터뷰 내용이 실린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데리다의 학자로서의 삶이 화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고교생때는 축구에 빠져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도 낙방했었다. 재수 끝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도 역시 한번 낙방한 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81년엔 프라하에서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비밀회합을 갖다가 체포돼 미테랑 대통령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편 끝에 추방되기도 했다. 1980년 파리 10대학 철학과 폴 리쾨르의 후임 교수를 선발할 당시에는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50의 나이에 데리다는 뒤늦게 소르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오지만, 리쾨르 후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데리다는 1983년 스스로 국제철학학교를 창설,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음... 어찌되었건..... 몇년전 그의 저서 "글쓰기와 차이"를 스터디 하던 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던 때를 떠올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참고] 유명 철학자들의 최후
쇼펜하우어(1788-1860) : 대표적인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콜레라가 창궐하자 서둘러 남쪽 지방으로 피신했다. 겉으로는 염세를 이야기하면서도 자살하기는 커녕 오히려 장수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년)에서 스스로 예지자, 즉 '초인'이 되려 하였다. 1889년 1월 니체는 이탈리아의 투린 광장에서 채찍질당하는 말의 목을 잡고 울부짖다 쓰러졌다. 정신착란이었다. 그는 10여년을 광인(狂人)으로 살다 죽는다. '반유대주의'와 '국수주의'에 대해서 강하게 비난했던 그는 사후(死後), 히틀러를 비롯한 파시스트들에게 그들의 이론적 근거를 뒷받침해준 철학자로 이용당하고 만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실존주의자들과 탈근대론자들에 의해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발터 벤야민(1892-1940) :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철학자 중의 하나이다. 흔히 그를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생전에 출간된 유일한 그의 책이었던 "독일 비극의 기원"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부터 교수 자격 취득을 거부당한 아픔을 갖고 있는 책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세계 대전을 맞은 그는 나치에 쫓겨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려다 좌절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설에 의하면, 나치가 그를 잡기 위해 쫓아왔다는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도 한다.
롤랑 바르트(1915-1980) : 1980년 2월 25일. 당시 사회당 당수이자 대통령이었던 미테랑 대통령은 한때 자신의 비판적 지지자였으나,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던 좌파 지도자들을 만찬에 초대하였다. 초대된 사람 가운데에는 롤랑 바르트와 미셀 푸코도 있었다. 만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롤랑 바르트는 작은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 사고 이후 약 한 달 뒤, 바르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설에 의하면, 바르트가 다리 절단 수술을 거부해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얘기도 있고, 교통사고 후유증과 만성 폐질환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다. 또 일설에 의하면, 그 작은 트럭은 하필 '쓰레기차'였다고 하며, 정말 일설에 의하면 우연한 사고가 아닌 '타살'이었다는 말도 있다.
루이 알튀세르(1918-1990) :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스 베리에르의 한 병원에서 72세로 작고했다. 마르크스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스스로 혁명의 불가능을 입증한 셈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는 말년에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제자였던 니코스 풀란차스가 자살한 이듬해(1980년), 알튀세르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자신의 아내 엘렌을 목졸라 살해한다. 알튀세르는 정신착란 상태에서의 살인이라는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은 뒤10년을 더 살았지만, 주로 병원과 요양원에서 보낸 그 기간에 제대로 된 철학 작업이라고 할 만한 것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죽음을 앞두고 남은 힘을 추슬러 자서전 "미래는 오래 계속된다"를 집필했다.
미셀 푸코(1926-1984) : 푸코는 파리에서 AIDS로 사망했다. 그의 미완성작 "성(性)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대 지성인들은 동성애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차적인 형태의 사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푸코 역시 동성애자였다. 특히 다니엘 드페르는 그의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참고로, 푸코와 데리다는 매우 사이가 안좋은 관계였는데, 그것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대해 데리다가 격렬한 비판(1963년)을 가한 직후에 시작된 것이었다. 그동안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을만큼 사이가 나빠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푸코가 1972년 데리다의 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더욱 악화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푸코는 데리다를 '텍스트 씨(氏)'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린다. 데리다는 이에 대하여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푸코는 말년에 들뢰즈와도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한때 '금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라고 극찬을 하던 푸코가 1975년 무렵 이후 적극적인 실천 행동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급진적이었던 들뢰즈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단 한번도 다시 만나지 않았던 두 사람은, 푸코의 사후, 들뢰즈가 장례식장에서 '조사'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화해하게 되었다.
질 들뢰즈(1925-1995) : "죽음은 자연으로의 회귀"라고 말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1993년 들뢰즈는 80년대와 90년대를 긴 사막의 시대로 규정하고, 더 이상 글을 쓸 의욕도 없으나,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위대함"을 써낸 후 절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들뢰즈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 이상은 각종 인터넷 사이트 및 문헌, 신문기사를 종합한 내용임.
# by | 2004/10/11 20:21 | 推薦 ::: 스크랩/정보 | 트랙백(2)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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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분명한 건 이 나라 언론이 거의 몽땅 엉망이라는 것.
ㅡㅡ;;
뭐 연합뉴스 베낀 기자들에 비하자면,
내가 쓴거라고도 할 수 있겠군.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