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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라디오, 그리고 정은임 아나운서
다른 글에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내 어린시절 꿈은 스포츠 해설가였다. 그 시절 내 우상은 하일성 아저씨였다.
그보다도 어린 시절, 내 꿈은 만화가였다. 그 시절 내 우상은 허영만, 김철호 아저씨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 꿈은 영화와 관련된 그 무엇이었다.
영화 전문 프로그램 PD를 꿈꾸기도 했고,
영화평론가를 꿈꾼 적도 있으며,
영화감독을 꿈꾼 적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영화배우를 꿈꾼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 우상은 정성일 아저씨였다.

내가 영화의 꿈을 그저 '꿈'으로만 남겨둔 것은
아마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한때 나는 '영화보다 문학이 덜 산업적이라....'라는
내 스스로도 알 듯 모를 듯한 변명을 해댔던 것 같다.

어쨌든,
아마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나는 라디오키드였다.
그 무렵,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그리고 오미희의 가요광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각각 외국음악과 우리 가요 인기곡 20곡을 매주 뽑아 방송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그 곡들을 300원짜리 스프링 노트에 빼곡하게 적었던 기억이 있다.
그 덕에, 난 85,86,87년 언저리에 인기 있던 음악은
지금도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편이다.
고등학교 때는 심야방송으로 더 빠져들었었는데,
91.9 MHz MBC FM은 당시, 내게는, 상투적 표현으로, 유일한 '낙'이었던 듯하다.
정혜정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0시의 데이트"란 프로그램,
그리고 1시부터 시작되는 "FM 영화음악",
그리고 2시부터 시작된, 지금은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최재혁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그렇게 이어 듣고 잠자리에 들곤 했었다.
(사실 이 시간대가 맞는지, 지금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기억하는 한, 내가 처음 듣던 FM 영화음악의 진행자는 조일수 아나운서였다.
중년의 중후함이 느껴지던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바뀐 것은
대입시험을 앞두고 있던 92년 11월 2일.
FM 영화음악의 새 진행자로 정은임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대학에 오고부터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꾸준히 듣지는 못했기에,
내가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이하 정영음)의 골수팬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영화 전문 잡지 하나 없었고,
교보문고를 가봐도 우리말로 된 영화 전문 서적은 불과 열권 남짓 하던 그 시절,
내가 '영화'를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무엇으로 생각했던 것은,
이 프로그램 덕분이었고,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 정은임과,
그 프로그램의 고정게스트 정성일 덕분이었다.

"인터내셜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음악이라고 틀어주던,
때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치적이며,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전문적이었던,
이 놀라운 방송은 공안정국이 절정에 달하던 95년 4월 진행자가 바뀌게 된다.

당시 새로운 진행자 배유정이 크게 못났기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인터넷카페도 아니고 동호회 하나 설립하려면 조건이 무척 까다롭던
당시 PC 통신에서 '정영음'을 되살리자는 동호회(천리안 '정추임' 하이텔 '정다모')가
결성되고 활발히 활동했던 사실은, 그후로 '정영음'을 하나의 '신화'로
기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배유정, 홍은철, 최윤영 등이 새로운 DJ로 프로그램을 이어나갔지만,
정영음에 대한 아쉬움만 커져갔을 뿐이다.

'정영음'은 8년여만에 돌아왔다.
98년 영화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던 그녀는,
TV 프로그램 '행복한 책읽기'를 통해 복귀했고,
그녀의 초심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MBC 노조 여성부장직을 맡았고,
드디어 2003년 10월 23일 '정영음'으로 드디어 복귀하기에 이른다.
방송 시간대는 가히 엽기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새벽 3시부터 4시.

이 시간에 깨있는 경우는 많았지만,
나 역시 정영음의 복귀를 반겨했음에도,
컴백 이후엔 거의 방송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2003년 11월 <올드보이>의 개봉일 전야에, 심야로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차속에서
박찬욱과 정은임이 나누던 대화를 들었던 것 외에는,
(아마 한두번 새벽에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며 들었던 기억은 있지만)
그다지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다.

돌아온 '정영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국영화가 1000만 관객 시대를 맞이한
2004년 4월, 불과 6개월 만에 '정영음'은
새벽 4시 방송이었던 '송기철의 월드 뮤직'과 함께 폐지되고 만다.
진행자만 바뀐 것이 아니라 MBC FM 영화음악이라는 프로, 월드뮤직이란 프로,
두개의 매니아 프로그램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접촉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MBC 측의 발표는 두 프로그램의 팬들,
그리고 다양한 음악과 방송을 원하는 사람들 모두를 분노케 했다.
실상은 더 암담하여,
'정영음'의 경우는 "대중적 방송 답지 않게 너무 '영화적'이다"라는 이유가,
'월드뮤직'의 경우는 "너무 매니아적이고, 음악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가
덧붙여졌다고 한다.
(수탉을 사다놓고, 넌 왜 날지도 못하고 알도 못 낳느냐고 따지는 격이다.)

산업, 혹은 상업과 가장 거리가 멀고 싶었던 방송,
그런 방송들이 그렇게 사라져간 것은
그 방송의 팬이 아니었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은임은 근래 뉴스 방송을 통해 근근히 목소리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녀의 팬들은 뉴스 도중 거듭되는 그녀의 '실수'와 '방송사고'가
그녀의 아픈 마음 때문에 비롯된 것 같아서, 더욱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친했던 동료 김태희 아나운서의 죽음과 홍은철 아나운서의 추문으로
그녀는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곧이어 프로그램 폐지라는 충격까지 겹친 상태였던 것이다.

'정영음'의 팬들은 8년 넘게 기다리던 프로그램을 만난지 6개월만에,
또다시 항의 엽서 대신 메일을,
PC통신 동호회 대신 인터넷 카페를 통해,
'정영음'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이어나가야 했다.

정은임 아나운서.
리버 피닉스를 사랑했던 그녀,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출신이지만 엘리트라기보다는 낮은 곳이 어울리던 그녀,
그가 좋아했던 <로저와 나>의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신작 <화씨9/11>이
멀티플렉스에서 개봉되기 바로 전날,
안타까운 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란다.

나는 아직,
그녀가,
그리고 '정영음'이
'전설'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했던 It Ain't Over Til It's Over 란 노래 제목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니까.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멘트 2004년 4월26일 마지막 방송 ◈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나희덕 서시)

안녕하세요?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말로 '여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 입니다.
단 한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 드리겠습니다.

2004년 4월 '정영음'의 두번째 마지막방송 (Full ver.)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2003년 10월 28일 오프닝멘트 ◈

새벽 세 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백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에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95년 마지막 방송 오프닝멘트 ◈

1995년 3월 31일 (4월 1일 새벽) 마지막 방송

꽃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지는 날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이별이 아니구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피는 날에서 꽃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간 것이 아닙니다
꽃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피는 길을 갑니다

(음악)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영화 흑인 올훼 중에서 Manha De Carnaval, 카니발의 아침. 오늘 첫 곡으로 띄워 드렸습니다. 꽃 피는 날, 꽃 지는 날이라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귀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싯귀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까 꽃 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사실 지난 2주일 동안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동안 소개해 드리지 못한 엽서, 사연들을 어떻게 다 정리해서 소개해 드릴 수는없을까, 사실 그 동안 제가 엽서니 편지니 소개 못드린 것에 대해서 늘 죄송하게 생각한 것 아시죠? 그리고 또 MBC 레코드실에 올라가서 하루에 몇 십장씩 음반을 찾아오곤 했었는데요. 이곡도 들려 드리고 싶고 이곡도 들려 드리고 싶고 참 좋은 데, 끝나기 전에 더 좋은 곡을 한 곡이라도 들려 드리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는데, 참 그게 어떻게 보면 오만했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다음에도, 내일도 방송은 계속 되고요. 또 좋은 분이 좋은 곡을 들려 드릴테니까요. 자, 다음 곡 띄워 드리겠습니다.많은 분들이 청하신 곡인데요. 제가 방송을 맡은 후에 처음으로 시내에 나가서 구해온 앨범이에요. 제가 갖고 있는 앨범인데. 천장지구 중에서 비안드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짧은 순간의 사랑. (음악-짧은 순간의 사랑) / (CF) / (음악-Midnight Blues) 영화 '날이 새면 언제나'에 삽입된 Midnight Blues. 오늘은 좀 느낌이 다른 곡으로 들어 봤습니다. 쟝끄로드 보렐리가 연주했는데요. 사실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으로 들려 드려야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블루스를 좋아하게 만든 곡이었거든요. Midnight Blues. 그뒤에, 이곡을 들은 이후에 블루스,솔,재즈 이렇게 흑인음악에 모두 빠져들게 만든 그런 음악이었는데, 아, 오늘 제가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죠. 그런데 어떡하죠? 한 시간을 제 얘기로 사실 꾸몄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리면서 그동안 여러분의 이야기만 들어 봤는데 제 영화들, 그러니까 제 인생에 남았던 사연있는 영화들도 한번쯤 소개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정은임의 내 인생의 영화 다섯편, 오늘 소개해 드립니다.


'정영음' 95년 눈물의 마지막 방송 (Full ver.)



♣ 그밖의 정영음 관련 자료들 모음 ♣


You're So Cool :::: True Romance O.S.T (Hans Zimmer)
92-95년 '정영음' 클로징 시그널


'정영음' 94년 모월 모일 방송 오프닝 멘트
오프닝 시그널은 Hans Zimmer 작곡의 True Romance O.S.T 중
Amid The Chaos Of The Day


2003년 10월 21일 돌아온 '정영음' 첫방송 (Full ver.)
새로운 시그널은 Old Home Movie :::: Arizona Dream O.S.T (Goran Bregovic)
아담 샌들러 주연의 <펀치 드렁크 러브>를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28분 경에는 You're So Cool 이 흐른다.


It Ain't Over Til It's Over :::: Lenny Kravitz (영화 Boxing Hellena O.S.T)
정은임 아나운서가 좋아했던 노래.
위에 있는 2003년 10월 복귀 첫방송 첫곡이었고,
2004년 4월 26일 마지막 방송에도 첫곡이었던 노래.


8년만에 재회한 정성일과 정은임의 방송
(FM 시네마테끄 / 2004년 1월 7일)
2004 나의 블로그 톱10
by 갈림 | 2004/07/24 02:31 | 日常 ::: 나 | 트랙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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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 Piece of C.. at 2008/01/31 15:34

제목 : 나의 마지막 라디오, 정은임을 추억하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2004년 사고로 생을 마감한지 벌써 3년이 넘어간다. 갑자기 다시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떠올린건 얼마전 피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그녀 방송파일 때문이었다. 점심먹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그녀 죽음을 전해들었을때 느꼈던 심한 상실감이 기억난다. 더이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상실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정영음과의 기억, 그 좋았던 추억 때문이었을게다. 공부가 일이었던, 고등학교때 토요일마다 밤을 세워 숨죽이며 라디......more

Commented by 덕소후배 at 2004/07/25 03:16
뭐랄까... 이 언니 어쩐지 사적으로 아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번의 소식이 참.. 안타까워요. 나 같은 사람 많을텐데.
Commented by 갈림 at 2004/07/25 12:49
그러게나 말이다. 좋은 결과가 있어야할텐데....
Commented by 갈림 at 2004/08/05 00:12
정은임 아나운서가 저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 못다한 여행을 맘껏 즐기시길......
Commented by 민조 at 2004/08/07 01:30
그녀를 통해 처음 들었던, 그리고 보았던 '레닌그라드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다시는 그렇게 맛있게 영화를 듣는 일은 없을 거다. 추모할 틈도 없이 이렇게 그녀를 보내는구나.
Commented at 2007/04/01 22:29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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