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두 분 대통령의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리뷰] 권력과 개인 :::: 효자동 이발사

송강호... 성한모 역 / 문소리... 김민자 역
이재응... 성낙안 역 / 손병호... 장혁수 역
박용수... 박종만 역 / 조영진... 통치자 역
류승수... 진기 역 / 윤주상... 최씨 역
정규수... 왕씨 역 / 오달수... 안씨 역
오창경... 청와대 요원 역

각본 : 임찬상
감독 : 임찬상
촬영 : 조용규
편집 : 김현
프로듀서 : 신유영, 김홍백, 박성호
제작 청어람
배급 쇼박스



<효자동 이발사>의 시놉시스와 예고편을 보고 나서
설마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영화를 본 몇몇 분들이 <인생은 아름다워>를 떠올리셨다길래,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래 한국영화들에는 우리의 현대사가 배경이 된 영화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조폭 대결을 방불케하는 마케팅과 극장장악으로 나란히 천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었고, <효자동이발사>, <하류인생>
등이 있습니다. <노는계집 창> 이후, 다시는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은 제가 보질 않은 관계로
뭐라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앞의 세 영화 가운데 <효자동 이발사>
는 현대정치사의 핵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영화입니다. 구체적
인명은 장면, 이기붕 정도만 정확히 등장하지만(왜 이들만 실명일까요?)
누구든지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 육영수, 전두환 등을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마도
실미도보다는 효자동이 청와대에 가까이 위치한 동네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효자동 이발사>는 <실미도>는 물론이고,
역사의식이 전무하다시피한 <태극기 휘날리며> 이상으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효자동 이발사>는 단순한 코메디로만 느껴지기엔
이미 너무 많은 현대정치사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보수 내지는 극우 정치 이데올로기로 치장된
영화일 수밖에 없는 반면, <인생은 아름다워>가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인 환타지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영화가 발담고 있는
정치적, 역사적 사실이 상대적으로 오래된 과거이며,
관련된 에피소드(혹은 사건)도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영화는 정치사적 에피소드나 인물을 배제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이미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인 영화가 될 뻔도 했습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분들이 문소리의 존재감이 너무나 안 느껴졌다고
말하시는데, 그건 이유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영화에서 어머니(혹은 여성)의 역할은
자식을 '출산'해주는 역할말고는 별 의미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럴듯하게 상업적 포장을 하자면,
'아버지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그건 너무 너그럽군요.

이 영화의 초반부에는 근래 한국 영화 중에서 아마도 가장 악질적인
성범죄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성한모(송강호)가 김민자(문소리)를
겁탈하는 장면입니다.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서술자인 낙안이가
태어나게 된 과정을 묘사한 것이죠. 김민자는 고향에 정혼을 약속한 사람이
이미 있었는데다가, 성한모에게 고용된 노동자 입장이라는 점에서
권력관계를 내재한 이 겁탈은 그 자체로 악질적 범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성한모는 김민자의 낙태요구 또한 '사사오입'이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거부합니다. 이 장면이 더욱 악질적인 이유는
이 범죄가 관객의 입장에서 전혀 심각한 범죄 행위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낙안이의 치료과정에서도 어머니의 역할은 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한모가 청와대 이발사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낙안이의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역할은 김민자의 몫으로
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 몫 마저도
아버지 성한모가 맡아버립니다.

낙안이가 성한모와 함께 강원도 산골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용의 눈과 국화꽃을 달여 먹으라는 허무맹랑한 비법만을 전달받고
돌아올때, "어머니껜 뭐라고 말씀드리죠?"라고 말하는 대사가 없었다면,
그리고 문소리의 실감나는 경상도 사투리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극단적인 마초 영화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저의 '오버'인거 물론 압니다. -.-;;)

또한, 이 영화는 단순한 '아버지 영화'거나 '소박한 소시민 영화'로
보기에는 너무나 '권력'의 속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 권력관계는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필수 전제로 하는 가운데
이뤄집니다.

낙안이는 아버지를 놀리는 아이에게는 무작정 덤빕니다.
아버지와 그 명예를 지켜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됩니다.
더욱이 낙안이는 자신을 불구로 만들뻔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하여
눈꼽만큼의 불만도 표출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절대적 충성입니다.
성한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각하는 국가고, 국가는 (국민의) 아버지입니다.
성한모는 자신의 아들을 불구로 만든 국가와 각하에 반발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깎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한모가 용의 눈을 파내는 장면에서, 성한모는 무척이나 망설입니다.
심약하던 정보부장(박용수)은 경호실장 장혁수(손병호)와 장자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아버지, 즉 대통령을 살해합니다만,
성한모는 그 영정 그림에서 눈을 긁어내는 일조차도 힘겨워합니다.
그 마음에 감동한 아버지의 은덕인가요? 대통령의 운구행렬은
효자동이발관에 머무르면서 낙안이를 다시 걷도록 도와줍니다.
(이건 순전히 제 주관적 해석입니다만......)

이 영화의 또다른 단점은 예고편에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이, 예고편만 볼 걸 그랬다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이 문제는 예고편을 잘못 만든 측면도 있지만,
안이하고 평이한 드라마 탓이 큽니다.
<범죄의 재구성>이 다소 실망스런 예고편에 비해
훨씬 두터운 살코기를 지니고 있는 본 영화의 드라마를 과시한 것과
비교될 만한 부분입니다.
또한, 낙안이를 서술자로 삼은 것도 안이한 태도로 보여집니다.
낙안이가 분명히 서술자(나레이터)이긴 하지만, 이 영화의 시점(視點)은
결코 낙안이로 볼 수 없습니다. 아이를 서술자로 삼은 것은
이 영화를 휴머니즘적 감동의 영화, 혹은 아버지(가족)의 영화로
만들기 위한 장치로서 선택한 방식이었겠지만, 그 상투적 선택은
오히려 관객이 성한모에 대하여 감정이입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감동을 느낄 틈이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효자동 이발사>는 2000년 쯤 <월간조선>인가에 실린
실제 박정희 前대통령 전담 이발사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들어진 듯 합니다.
이발사를 통한 권력풍자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나 <피가로의 결혼>같은
오페라에서부터 매력적인 설정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영화에서도 김희갑 선생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전속 이발사로
출연한 68년작 <잘 돼갑니다>에서 이미 시대 풍자를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잘 돼갑니다>는 박정희 시대에 상영금지를 당해서
20년이 지난 뒤, 1989년에서야 개봉이 되었답니다.
<효자동 이발사>는 우리 근현대사를 평범한 사람의 시점에서 바라보기에
적절한 좋은 설정을 차용했음에도, 그 이후의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듯 보입니다. 정치성, 코메디, 감동 그 어느쪽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이 영화는 아쉬움을 넘어 '안타까운' 영화가 되어 버린 듯 합니다.

사실은, 권력에 대하여 아무런 저항조차 못한
성한모와 그 가족이 끝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과거 현실이 더 안타깝기는 합니다.

p.s. 사적인 이유로 이 영화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인호는 이 영화를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p.p.s. 이 영화의 배우들의 연기는 하나같이 나무랄 데가 없다. 송강호, 문소리, 윤주상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연탄장수 안씨 역의 오달수는 연극계에서는 이미 유명배우였지만, <올드보이>에 이어 또한번 작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조연급 거의 모두가 연극계에서는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니까 뭐....

by 갈림 | 2004/06/01 20:28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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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얼음과자 at 2004/06/01 21:35
저는 이 영화 보는 내내 장예모 감독의 '인생'이 생각이 났어요
'효자동..'은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너무 어정쩡하게 되어 버렸더군요. 장예모 감독의 '인생'도 역사의 격변속에 희생되던 한 소시민의 삶을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지만 훨씬 탄탄하고 단단한 구성이었던 거 같애요. '효자동..' 은 감독의 내공이 아쉽던 영화였습니다.
Commented by 갈림 at 2004/06/02 01:46
그렇군요. '인생'이란 영화도 있었죠. 위화라는 중국 소설가를 뒤늦게 알게 되고는 더 좋아하게 된 영화였는데.....
장예모도 '인생'에 다다를 때까지 많은 내공 수련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부풀려진 초기작들보다 '인생'은 여러모로 나아요.
저도 장예모 감독 영화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영화랍니다.
Commented by seal at 2004/06/03 00:27
자꾸 나한테 어디서 울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놀리지 말라고, 나도 안타까워 울었지 감동이라 울었던 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나는 남들 잘 안 울때 우는 독특한 눈물샘의 소유자;;(반지 보고도 울었으니 말 다했지;;;)
Commented by 갈림 at 2004/06/03 01:00
나는 남들 울때 웃는 독특한 사람인가?
태극기 보면서 웃음 참느라 고생한 거 생각하면....
Commented by youngjune at 2004/06/04 13:15
갈림 = 변태
Commented by 갈림 at 2004/06/04 13:42
버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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