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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당선작 (3)(4)
2004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입니다.
뒷부분입니다.



3. 텍스트 판본들의 향기 속을 헤매는 ‘나비’의 텍스트


김영하의 장편 ‘아랑은 왜’는 그야말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즉 메타적 이야기라 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무엇을 얘기하는가’보다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의 측면을 극단적으로 집중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본래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나’(‘동서문학’ 98년 여름호)라는 중편 소설이었는데, 본래의 중편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던 현재시점의 ‘영주’란 인물을 통해 그녀를 설화 속 ‘아랑’과 중첩되게 만듦으로써 장편소설 ‘아랑은 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논자들이 평했듯이 ‘아랑은 왜’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인 이야기 겹들을 가지고 있는 다층적 액자 소설이다. 첫 번째 이야기 겹은 원설화(原說話)라고 할 만한 ‘아랑설화’이다. 이 소설은 실전(實傳)하는 이 설화를 기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허구적으로 창조해낸 비본(秘本) ‘정옥낭자전’이 두 번째 이야기 겹을 이루며, 김억균이라는 인물에게 근대적 탐정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추리소설’이 세 번째 이야기 겹을 이룬다. 네 번째 이야기 겹은 현재를 사는 ‘박’과 ‘영주’의 이야기인데, 이들을 통해 ‘아랑’의 이야기는 무시간적, 혹은 초시간적 이야기가 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마지막 층위는 작가가 소설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부분으로, 일종의 피란델로적 기법이 적용된 부분이다. 또한, 그 겹겹의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어딘가에는 본래의 중편소설 ‘아랑은 왜 나비가 되었나’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듯 ‘아랑은 왜’는 다층적인 이야기 겹을 통하여, 이야기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전달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메타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정옥낭자전’이라는 허구적 비본을 언급하는 형식은 사실, 우리 역사 소설에서 그리 흔한 방식은 아니지만,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보르헤스의 여러 소설들을 떠올려 본다면, 그렇게 낯설고 새로운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아랑은 왜’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지점은 그 여러 겹의 이야기 층위들을 너무나도 가볍게 넘나들고 있는 소설 속 작가, 혹은 서술자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소설을 쓰는 방식’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자세라기보다는 그저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고 즐기는, 장난스러운 놀이의 모습이다.

소설 속 역할을 맡을 배우들이 오디션을 보러 오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부분이라든지, ‘박’과 ‘영주’라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부분이 대표적인 예이다.


소설에 등장해보겠노라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몇 명의 배우가 오디션을 통과했다. 먼저 소개할 인물은 어사 조윤 역을 맡을 배우다.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남자다. 어깨는 구부정하여 비굴하게 보이나 막상 눈을 보면 범상치 않은 광채가 난다.(50쪽)

혹시 ‘서두’라는 장에서 잠시 등장했던 영주라는 인물을 기억하시는지. 우리가 ‘박’이라 부르는 인물과 관계가 있는, 이미 죽어버린 여자. 어쩐지 아랑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암시를 던져주는 여자다. 그러나 그때는 그 여자가 몇 살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따위의 구체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97∼98쪽)


소설 속의 인물은 그 인물이 전형적 인물이든, 개성적 인물이든 간에 소설 속의 사건을 통해 드러나야만 인물의 행동이나 성격에 필연성이 생기고, 핍진한 이야기 전개가 가능하다. 소설에서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을 유의해서 살펴본다면, 소설이라는 장르가 변화하고 발전해온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대개의 고전소설에서는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에 외양부터 성격까지 한꺼번에 설명하고 한정해주는 서술이 이루어지는 반면, 근대소설에서는 인물의 행동과 갈등을 통해 제시된 사항들로써 독자가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랑은 왜’의 인물은 모든 인물이 허구적으로 꾸며진 ‘허상’임을 강조하듯이 형상화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원설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든, 아니면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든, 그 인물의 ‘인위적’ 형상화 과정 자체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관습을 따르는 독자들은 이렇게 창조된 인물들이더라도 언젠가는, 잘 짜여진 이야기 흐름, 즉 플롯 위에서 움직이게 될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아랑은 왜’에서의 인물들은 짜여진 플롯 위에서 활동하고, 갈등할 기회를 별로 갖지 못한다. 완성된 플롯이 끝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독살에 사용된 반묘를 찾아내고 그 용법을 김령에게 물어 알고 아랑의 실제 신분을 밝히기 위해 기생안(妓生案)을 압수할 것이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그런 장면을 얼마든지 넣어 작품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이 사건을 좀더 복잡하고 정교한 추리극으로 만드는 데 있어 이런 자료들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217쪽)


위의 경우처럼, 원설화인 ‘아랑설화’, 그리고 허구적 판본인 ‘정옥낭자전’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사건이나 장면을 개입시킴으로써 설득력과 핍진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노출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지고 변형된 이야기들의 조합은 제시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아랑은 왜’는 확정된 플롯에 따른 이야기 전개를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파편화되어 있고, 그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겹에서,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존재하며, 서로를 스쳐지나갈 뿐이다. ‘아랑은 왜’는 다양한 이야기 겹을 가지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이야기(story)’다운 ‘이야기 겹’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겹들은 부실한 줄기에 매달린 꽃잎들처럼 불안하게 흔들린 채로 고정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의 결말 처리를 놓고서는 심지어 작가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는 상황이 제시되기도 하며, 등장인물이 내용 전개에 대해 극렬한 항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봐요. 박. 당신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제 생각을 말해도 된다면 저는 박이 아랑을 만나게 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중략)…영주씨. 당신은 어때요? 저는 반대예요. 말하자면 소설 속의 영주는 어린 여자 밝히는 박이라는 남자에게 살해된 건데, 이건 그저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일 뿐, 여기다 무슨 다른 상징을 덧씌우는 건 반대합니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인 여성을 신비화하는 것은 남성 작가들의 전형적인 폭력입니다.(278쪽)


사실, 어떠한 소설이든, 심지어 기존의 이야기나 설화를 재구성하는 소설일지라도, 작가는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에 있어서 강력한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롤랑 바르트나 미셀 푸코가 작가의 죽음을 언급한 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독서를 위해서는 ‘작가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할 만큼 작가의 권위는 강력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출된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일 수 없다. 권력을 확립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노출된 이상, 그 권력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작가의 의도와 권위가 문제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작가가 글쓰기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모든 방면, 그러니까 인물을 형상화한다든지,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든지, 기존의 이야기를 변형시킨다든지, 시대적 배경을 설정한다든지 하는 모든 권력의 양상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글쓰기의 권력을 폭로하는 첩경이 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심지어 ‘아랑은 왜’라는 소설은 스스로 밑바탕으로 삼고 있는 원설화인 ‘아랑설화’조차 온통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아랑설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나 장소, 그리고 살인 장소를 비롯한 사건들의 핍진성 여부를 따지며, 그 다양한 판본들을 번갈아 의심한다. ‘역사’가 또 다른 판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것 자체로 스스로 ‘역사’이길 부정하는 것이 되겠지만, ‘설화’는 생성의 과정부터 확정된 고정 판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랑은 왜’가 확정된 판본의 플롯을 제시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 겹들을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은 이야기의 근원을 ‘설화’에 두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의 텍스트적 욕망이 ‘근원의 부재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후자의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 쓰여지거나 이야기된 것 가운데 ‘날것’ 그대로 자연스럽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며, ‘진실’과 ‘허구’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허구의 폭로, 혹은 허구에 대한 비아냥거림은 사실, 작가 김영하의 소설에서 자주 발견되던 부분들이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찬 세상”(‘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이라는 빈정거림이나,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흡혈귀’)는 경멸에 가까운 언급이 그러한 예이다. ‘아랑은 왜’는 이러한 허구성에 대한 폭로를 그야말로 소설 전면에 부각시킨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폭로의 결과는 무엇일까? ‘소설가’는 자신의 허구화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킴으로써, 어떠한 ‘사실’에 대한, 어떤 ‘근원’에 대한 환상도 독자가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 특히 완성된 플롯을 끝내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소설가’는 자신의 권위와 권능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방기(放棄)한다. 물론, ‘소설가’의 이러한 의도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이 텍스트 그 자체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실제 작가 ‘김영하’의 의도와 동일시된다는 점은 관습적 독서가 견지하는 ‘미메시스 환상’의 마지막 보루이다.

작가가 비워둔 그 자리에서 독자는 이야기의 빈틈들을 메워가면서 텅빈 ‘플롯’을 만들어 가야 한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이쪽저쪽의 이야기 겹들을 떠돌며, 어떠한 이야기들을 선택하고 연결할지를 고민하여 ‘놀’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분명해질 필요는 없다. 허구적 소설이든, 현실이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매우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부족한 정보들을 가지고 상상하고, 추측하고, 때로는 즐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이미 있던 이야기의 요소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작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16쪽)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오늘 우리집에 중국 음식을 배달하고 간 젊은이의 과거를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그는 그저 중국집 배달원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중략)…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기껏해야 단편적으로 알 뿐이라는 인식을 소설쓰기에 적용할 수도 있다. 이걸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읽는 사람들은 피곤해진다.(199∼200쪽).


‘아랑은 왜’의 복잡한 이야기 겹들 가운데 하나의 이야기 겹 속의 인물은 그 안쪽 이야기 겹에 대한 독자이기도 하고 작가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여러 이야기 겹들과 인물들, 작가들(혹은 서술자들)과 독자들을 넘나든다. ‘아랑은 왜’에서 텍스트란 작가에 의해서도, 원설화나 원이야기에 의해서도 확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는 원래의 이야기에 담긴 플롯과 인물 주위를 부유(浮遊)한다.

아랑의 전설에서 ‘아랑’이 왜 하필 나비가 되어 자신이 죽은 내막과 범인을 알렸는지 이유에 대해, 이 소설은 이미 존재하는, 혹은 추정된 ‘범죄의 서사’에 범죄 용의자를 포함시키기 위한 극적 장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인물과 사건, 그리고 ‘이미 있었던 이야기’들 사이에는 언제나 빈틈이 있기 마련이고, 나비가 내려앉는 빈틈의 위치에 따라서 언제든지 새로운 서사는 만들어질 수 있다.

라캉에게 결여의 장소는 곧 ‘향유(jouissance)’의 장소였듯, 이야기의 빈틈들은 독자가 즐기고 놀 수 있는 ‘향유(享有)’의 장소이다. ‘아랑은 왜’는 ‘과거의 이야기’를 가지고 설화 속 이야기들과 그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노출된 권력’만을 지녔을 뿐인 ‘작가’로서의 한 인물과 한바탕 텍스트 위에서 즐기는 텍스트 공간이 된다. 그것은 텍스트를 향유하는 일종의 방식이며, 어떠한 근원도 없이 텍스트가 떠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사건을 만들어 나가게끔 하는, 텍스트 욕망의 놀이이다.




4. 소설의 ‘전유’와 ‘향유’



포스트 모던 시대란 언어의 허구성이 폭로된 세상이다. 그래도 허구적 이야기는 우리들 곁에 계속 머물고 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조그만 빈틈이 있는 한, 그리고 사람들이 현실에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는 한, 아마도 소설은 계속 쓰여질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욕망과 전략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소설은 허구적 글쓰기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소설은 한 작가의 완전한 창조물도 아니며, 현실에 대한 완전한 반영물도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다양한 욕망을 해결해줄 ‘언어’로 된 꿈이며 ‘텍스트’로 된 환상이다.

오늘날 글쓰기 자체에 대한, 소설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반성과 고민으로부터 ‘소설’이란 서사 예술은 새롭게 변화되고 있으며, 그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쓰는 소설’들이다. 흔히 ‘역사소설’이란 장르는 근대 소설의 탄생부터 유지되어온 장르이지만, 과거의 시간과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전복시켜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방식은 예전의 역사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시도일 것이다. 이제 그러한 시도, 그 다시 쓰기의 방식은 요컨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것은 각각 ‘전유’로서의 글쓰기, ‘향유’로서의 글쓰기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방식은 기존의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내면서도, 이야기의 근원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혹은 이야기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쓰여진다. 이 경우, 새로 쓰여진 이야기는 기존의 이야기의 근원을 탐색하거나, 그 근원을 새롭게 대체하는 ‘진실’을 밝혀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기존의 이야기와 역사는 새로운 이야기에 의해 ‘전유’되는 셈이다.

후자의 방식은 기존의 이야기를 여러 겹의 층위로 해체해 놓고서, 그 파편들 위에서 사건들과 배경, 그리고 인물들, 심지어 작가까지 뛰어들어 놀 수 있는 공간을 차려 놓는 글쓰기이다. 이 경우, 원래의 이야기는 온데간데가 없으며, 굳이 찾아낼 필요도 없다. 오직 이야기들끼리의 즐거운 ‘향유’가 펼쳐질 가능성만 제시될 뿐이다.

우리가 문학의 위기, 혹은 소설의 위기라는 풍문(風聞)을 뛰어넘어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두 소설, 혹은 두 소설의 방식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과정의 끄트머리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전망과 희망이 존재하리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by 갈림 | 2004/04/20 21:06 | 文學 ::: 문학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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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youngjune at 2004/05/11 22:27
어렵구나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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