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4월 20일
평론 당선작 (1)(2)

기쁘고, 또 부담스럽습니다.
1. 글쓰기의 한계와 복제의 글쓰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욕망이다. 소설은 하나의 허구적 세계에 대한 욕망을 언어로 담고 있다. 소설의 언어는 그 욕망을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드러내는 도구이자 장치이다. 언어는 현실을 재료 삼아 재단된 가상적 기호이며, 그러한 언어를 통하여 소설은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세계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이미 현실로부터 이중적(二重的)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21세기. 구조주의를 넘어서, 또 정신분석학을 넘어서, 수많은 담론들이 높바람처럼 불어대는 바로 지금은 언어의 허구성이 모조리 폭로된 시대다. 소설의 운명을 자각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또다시 새로운 허구의 세계, 우리의 소설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이미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날 다시 끄집어내어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들이 있다. 과거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이다. 말하자면, 현실이 아니라 ‘이미 이야기인 것’을 원재료로 삼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이미 있었던 이야기를 대상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패러디한다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언어의 허구성이 모조리 드러나 있고, 모든 텍스트는 상호 참조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경향의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또 다른 복제일 수밖에 없으며, 소설은 ‘자기 복제’를 통해서만 쓰여진다는 자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텍스트는 텍스트에 대한 텍스트다’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이미 쓰여진 텍스트 속에서 일어났던, ‘약호화(encoding) 과정’과 ‘글쓰기 행위’를 다시금 되짚어가면서 해호화(decoding)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글쓰기 행위 자체를 주목하는 것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작품’이 아닌 ‘텍스트’를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저자의 권위에 의한 저술이 아니라 스크립터에 의한 전사(轉寫)를 언급하는 것은, 백색의 창조라는 허위를 벗겨내고 ‘다시 쓰기’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결과이다. 바로 지금, 글쓰기의 한계와 서사의 한계를 깨달음으로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는 소설들이 있다. ‘글쓰기의 복제’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 글쓰기가 있다. 그것은 텍스트 주변 언저리보다는 텍스트 자체와 소설의 위상을 비추어보는 ‘자기 반영적’이고 ‘패러디’적이며, ‘나르시스적 서사’이다. 어쩌면, 진실과 실체에 사로잡혀 있는 형이상학적 사고는 이미 처음부터 그 자체로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김탁환과 황석영의 근작을 비롯한 역사소설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글쓰기 흐름과 무관하지 않으며, 여기 특별히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편의 장편소설을 주목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생각의 나무, 2001)와 김영하의 ‘아랑은 왜’(문학과지성사, 2001)가 그것이다.
2. 삶과 죽음 사이를 갈라내는 ‘칼날’의 텍스트
김훈의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물들을 밑바탕으로 하여 허구적으로 다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실존인물을 서술자로 삼고 있다는 점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소설이 출항을 앞두고 거두어들여야 할 닻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의 역사적 크기,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습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 사건과 그 인물과 관련된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기존의 이야기들. 그것들을 넘어서서, 다시 무언가를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는 것부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그 전쟁터에 목숨을 내걸고 있는 한 장군의 입과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리지 않아도, 이야기의 끝이 곧 죽음과 맞닿아 있다고 한다면, 이미 있는 이야기를 다시 써 나가는 과정은 죽음으로부터의 연기(延期)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칼의 노래’는 한 인물의 죽음보다 훨씬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이야기의 끝을 유보하고는 있지만, 끝내 인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야기는 다시 끝이 날 운명인 글쓰기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전장에서의 이순신의 삶은 ‘난중일기’와 함께 시작하여 끝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칼의 노래’는 ‘난중일기’에 대한 ‘다시 쓰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칼의 노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위에서만 존재하는 ‘외줄타기’의 텍스트이다. 이 외줄타기가 이어지는 한, 외줄 위의 이순신의 생명은 유지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생명이 유지되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으며, 이야기도 끝나지 않고 소설은 지속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마치 이순신의 ‘장계(狀啓)’와 같은 텍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장계는 이순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줄 것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할 것이지만, 결국은 그 장계는 이순신의 목을 겨냥하는 칼날이 되며,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미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1권 58∼59쪽)
‘칼의 노래’가 충무공에 대한 수많은 기존의 텍스트들을 새롭게 쓸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문제, 바꾸어 말하자면 완전한 허무와 무의미에 저항하여 발버둥치는 한 인물의 실존적 문제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더욱 극단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위악적 태도도 피할 길이 없다. 죽음이란 사회적 삶을 사는 인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전히 홀로되어 감당해야하는 사건이며,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1권 124쪽)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로운 싸움이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죽음에 직면한 충무공의 고통은 부하들이 굶어 죽는 가운데, 그야말로 ‘먹고 살아가는 사치’를 누리는 스스로에 대한 고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그해 겨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격군과 사부들이 병들어 죽고 굶어 죽었다. 나는 굶어 죽지 않았다. 나는 수군 통제사였다. 나는 먹었다. 부황 든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는 수영에서 나는 끼니 때마다 먹었다.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수십 구씩 묻던 날 저녁에도 나는 먹었다.(2권 53쪽)
이순신은 ‘수군 통제사’였기 때문에 살아야 했고, 소설 속의 ‘나’는 소설을 통제하는 서술자이기에 살아남아야 한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면서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나 다시 쓰는 이야기는 이미 그 죽음의 결말을 알고 있으며,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죽음을 유보시키면서 이어지지만, 어쩌면 죽음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더욱이 그 죽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다시 쓰기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죽음은 다시 쓰는 이야기의 출발이면서 결말이고, 이야기는 그 가운데에 존재한다. 이러한 역설적 문제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순신의 숙사 방안에 걸어놓은 환도 두 자루와 면사첩(免死帖)이다. 이순신은 수군 진영을 옮겨가면서도 이것들을 계속 자신의 방안에 걸어두고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내 운명의 지표인 것 같”(1권 168쪽)다고 말한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1권 129쪽)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 충동 사이를 갈라낸 자리에서 이순신이 겪어내고 있는 전쟁의 상황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국가와 그 국가를 쳐들어온 적들 사이의 대결이다. 이순신은 그 외적들과 맞서 싸운 민족사의 영웅이다. 그러나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대상은 외적뿐만 아니라 임금이기도 하다. ‘면사첩’을 보내온 것은 다름 아닌 임금이며, ‘면사첩’은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는 위협이다. 그리고 칼은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무기이면서, 적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 혹은 임금의 칼은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 수 있는, 죽음을 부르는 도구이다. 칼이 겨누는 곳은 어디라도 될 수 있고, 겨누는 곳이 달라질 때, 삶과 죽음은 경계를 넘나든다.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2권 21쪽)
면사첩과 두 개의 환도, 그들 사이 어딘가에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가 있고, 그 틈을 가로질러 베어낸 곳에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 출발이자 끝이 되며, 그 중간에 위치하는 이야기. 그것은 바로 ‘다시 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다시 쓰여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종결되는 지점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것이 다시 쓰기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다시 쓰는 이야기는 또다시 종결을 향해 치닫는다. 따라서 죽음을 피하고 유보시키면서 텍스트는 탄생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죽음 충동을 통해 또 다른 종결을 향해 나아간다.
임금이 보내온 고기 덩어리를 보면서 “적의 칼에 베어지거나 임금의 칼에 베어질 때, 나의 베어진 단면”(1권 158쪽)을 떠올리면서도 스스로 적장 아베를 칼로 베어내며 그 목숨을 가로지르는 칼날에서 “뜨겁고 뭉클한 진동”(1권 176쪽)을 느끼는 것이나, 자신이 죽을 사지(死地)를 물색하며 찾아다니지만 “죽어야 할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답답함”(1권 151쪽)에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바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면서, 동시에 죽음에 대한 충동이라 할 수 있다. 죽음 충동은 이야기를 종결로 이끌어 나가는 힘,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며 에너지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장 원초적인 자기애의 감정일 것이며, 나르시시즘을 넘어선 곳에는 늘 타나토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끝나는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이 맞서고 있는 치열한 대립의 종결에, 죽음이 있고 이야기의 끝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칼의 노래’의 ‘나’ 이순신의 몸에는 “적과 임금이 동거”(1권 182쪽)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묘한 역설을 통해 ‘이미 있던 이야기’를 되살려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간 ‘칼의 노래’란 텍스트의 본원적 욕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쓰러져 있던 육체를 부활시키거나 죽어있던 생명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던 시절로, ‘이미 있었던 진실들’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이다. ‘이미 있었던 진실들’로써 허무와 무의미, 무내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소설 속의 언급처럼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1권 114쪽)는 것이건만, 그리고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1권 124쪽)고 말하건만, 완전한 허무, 즉 죽음은 무척이나 두려운 대상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마치 칼로 잘라낸 것처럼 그들 틈 사이에 있지만, 그 갈라진 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 소설 전체를 억누르고 있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실천이 바로 이 텍스트이다. 그런데 그 실천으로서의 ‘다시 쓰기’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근원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을 복원하려는 ‘근원적 사실’에 대한 욕망이다.
나는 김수철의 초안을 대폭 수정했다. 적병의 숫자를 모두 지웠고, 포격과 불화살로 깨뜨린 적선은 30척이며, 적의 수급(首級) 여덟을 얻었다고 고쳤다. 그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중략)…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5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1권 124∼125쪽)
김수철이 쓴 장계의 초안을 고치는 것은 ‘사실’이 ‘허위’로 인식될 때 죽음이 다가올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며, 그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의 역사와 진실된 근원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적 태도로 보인다. 소설 속의 ‘내’가 진실에 집착하며, 그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끼듯이, 이 소설 자체는 ‘진실’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고 있다.
근원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두 권으로 된 이 소설의 뒤에 ‘연보’와 ‘인물지’를 덧붙여 놓으면서 그것을 통해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길 바란다”고 말한, 작가의 일러두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과거의 역사가 모두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그 역사로 되돌아가 이순신의 ‘실존’과 진실을 탐구하기를 욕망한다. 이 소설에서의 ‘다시 쓰기’는 한 인물의 감춰진 진실의 내면을 밝혀내는 숭고한 탐색이며, 이데올로기로 착색된 ‘난중일기’를 그 내면의 근원적 기록으로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근원적 ‘진실’로 돌아가려는 시도이자, ‘이미 있었던 것’을 새로이 확고히 하는 것이면서, ‘이미 있었던 것’을 근원 회귀의 순환 고리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새로 쓰는 텍스트’를 통해 과거의 텍스트를 전유(專有)하려는 시도이다. ‘전유’란 본래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활용되는 개념으로, 식민지배 관계에서 상대의 것을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전적인 지배와 권한 하에 다시금 가져다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는 기존의 ‘역사’와 ‘과거’를 다시 쓰되, 본래 그것이 누리던 ‘진실’의 권한을 누리고자 하는 텍스트적 욕망이 담겨 있는 ‘전유의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그 소설적 욕망은 마치 ‘칼날’처럼 텍스트를 자신의 의도대로 저며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소설은 역사와 과거를 전유하는 텍스트가 된다.
# by | 2004/04/20 21:05 | 文學 ::: 문학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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