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두 분 대통령의 서거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19년 1월의 매일신보

참고로 매일신보는 개화기 무렵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던 '대한매일신보'에서 그 명칭을 따온 신문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유일한 한글신문으로 남아 있던 '총독부 기관지'였을 뿐이었다. 이 무렵 매일신보의 편집장이었던 이상협은 이듬해 창간된 동아일보의 초대 '편집국장'을 맡게 되고, 1924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언론 활동을 계속해나갔다고 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연재된 것도 바로 이 '매일신보'를 통해서였다.

1919년 1월 22일자 매일신보 2면.
'태왕(太王)' 또는 '이태왕(李太王)'이라 칭해진 고종황제의 사진과 함께 '중환'중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1919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 2면.
1919년 1월 23일자 매일신보 3면.
고종황제의 서거 소식이 실려 있다.

1919년 1월 24일자 매일신보 3면.
"전일에 배(倍)는 되는 '통곡성(慟哭聲)"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거센 추위 속에 23일 아침 일찍부터 대한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늘에 사무치게 목놓아 우는 소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오후들어 사람들이 더욱 모여들자 기마순사(騎馬巡査)들이 여기저기를 경계하고 다니고 있었는데, 각 조합 기생들마저 찾아와서 통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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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그랬었군요. 아시다시피 고종의 승하 이후 2월 8일 일본에서는 이광수 등의 주도로 '2.8 독립선언'이 일어났고, 3월 1일에는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집니다. 고종의 인산(因山)일, 즉 국장일은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장 행렬을 보기 위해 서울로 몰려든 시민들까지 만세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3.1 운동의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고종 황제 '독살설'이었다고 하지요.

3.1 운동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기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적 사건이지요. 우리 현행 헌법 전문(前文)은 '3.1운동으로 탄생한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3.1 운동을 성공한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렵지요. 1919년 3월 3일. 고종의 국장은 예정대로 거행됩니다.
대한문 앞의 국장 행렬입니다. 지금의 '서울광장'과 '프라자호텔' 사이 도로라고 보면 되겠네요.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본 사진인데, 이 사진은 아직 본격적 장의행렬이 시작되기 전 장면입니다. 욱일승천기를 들고 있는 무장한 일제 군경의 모습이 보이네요.

사실, '레디앙'에 실린 이 투고기사를 보고 1919년 1월 매일신보 이미지를 찾아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경호관의 언행에는 분명히 문제가 많고 의혹도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만, '암살설'에 지나치게 휩싸이기보다는 더 중요한 과제가 무엇일지를 생각해볼 때라고 생각됩니다.

by 갈림 | 2009/05/28 00:28 | 溫故 ::: 기억/기록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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