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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도입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경고문 :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총살될 것이다. 그리고 김언수는 {캐비닛}의 첫 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13호 캐비닛'에 대해 굉장한 상상을 할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볼 생각이라면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그러했듯, 김언수의 경고는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반어적 도발이다. 결국 독자들은 김언수의 {캐비닛}에선 누구나가 스스로 상상한 것, 그 이상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2. 상상력의 박물지, 서른 네 편의 에피소드 김언수의 장편 {캐비닛}의 장점은 무엇보다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캐비닛}은 Y공기업 자재과에서 일하던 공덕근 대리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13호 캐비닛'에 대한 이야기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삼백일흔다섯 개의 파일 목록들에는 삼백일흔다섯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한마디로 비현실적 존재들 일색이다. 소설은 그 사람들을 '심토머(symptomer)'라고 부른다.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땅한 정의가 학계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리는 그들을 '징후를 가진 사람들' 혹은 '심토머(symptomer)'라고 부른다. 심토머들은 생물학과 인류학이 규정한 인간의 정의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그들은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쩌면 최후의 인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다. (30쪽) 손가락에서 선인장이나 은행나무가 자라나는 사람의 이야기, 입 속에 도마뱀을 키우는 사람이나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동시에 완벽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부터 겨울잠 자듯 몇 년의 세월을 죽은 듯이 보내는 토포러의 이야기와 시간을 건너뛰며 살아가는 타임스키퍼의 이야기까지, 그 파일 목록들은 초현실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외계인들이 지구를 활보하고 있다는 {맨 인 블랙}이나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을 다룬 {X맨}과 같은 SF 만화나 SF 영화 속에서는 종종 등장할 법한 초현실적 인물들의 이야기이지만, 이른바 '본격 문학'에서 이러한 인물들을 접한다는 것은 꽤나 낯선 일이었다.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에는 만화나 액션 영화 주인공이 소설 안에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김언수는 박민규와는 달리 시종 진지하고 공식적인 어투로 초현실적 존재들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더 허황된 이야기들이 한편으로 진지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13호 캐비닛'에 '공문서'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는 설정과 그 인물들과의 상담을 맡게 된 공대리의 업무적 상황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체적인 전문지식을 동원한 듯하게 꾸며놓은 작가의 전략 덕분이다. 토포러, 타임스키퍼, 메모리모자이커, 도플갱어,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다중소속자(multiappearance people) 등, 실제 사용되는 심리학·정신분석학·생물학적 용어와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용어들이 뒤섞여 제시되면서, 순간순간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닐까'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믿거나 말거나>나 <세상에 이런 일이>, <기인열전>류의 TV 프로그램을 보면 개미를 먹는 사람, 유리를 씹어 먹는 사람, 목이 180도 돌아가는 사람 등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을 화면을 통해 접할 수 있으니, {캐비닛}에 나오는 심토머들 가운데 일부는 실존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어 보인다. 허구적인 전문용어나 지명, 인명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전략은 보르헤스나 에코를 비롯한 수많은 전례가 존재하지만, 초현실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낱개로 띄어내어도 무방할 만한 작은 에피소드들로 분절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이 소설의 또 하나의 구성적 특색으로 볼 수 있겠다. 문득 <세상의 이런 일이>에 출연한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대중서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요즘 베스트셀러가 되는 교양서적들은 대개 짧은 분량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출퇴근길에 짬짬이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장편소설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분명한 매력이다), 그만큼 독자로서는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공대리가 처음에 몰래 13호 캐비닛의 문서들을 틈틈이 조금씩 읽어나갔던 것과 같은 짜릿한 기분도 느껴가면서 말이다. 뿐만 아니라, 공대리가 심토머들의 자료를 접하고 만나고 상담을 하게 되면서, 점차 그들의 존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공대리로 인하여 보안 해제된 그들의 에피소드를 독자들 역시 하나 둘씩 접하며 그들을 점차 이해해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점도 이러한 구성이 준 효과이다. "여기서는 뭐든 믿을 수밖에 없죠. 솔직히 말하면 요즘엔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도 제대로 서지 않는답니다.(47-48쪽)"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비단 공대리 뿐만 아니라,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3. 심토머, 타자, 혹은 나 수많은 심토머들을 접한 공대리는 그들을 점차 이해하게 되지만, 가슴에 붉은 전갈 문신을 가진 여인을 만나고 잠자리를 같이 한 직후,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자 너무 놀라 구역질을 하게 된다. 그녀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한 몸에 지닌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공대리는 이렇게 토로한다. 그 여자 생각을 하면 그렇게 황급하게 호텔에서 뛰쳐나온 내 모습이 부끄럽다. 정작 부끄러운 것은 수많은 심토머들과 만나며 내 몸과 이질적인 존재를 어느 정도 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믿음에 대한 배반감이었다. 그것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내 몸속으로 직접 밀고 들어온 이질적인 것에 당황했고 역겨워했고 분노했다. 그것으로 나는 나라는 인간의 크기를 자신에게 들켜버린 것이다.(190쪽) 심토머들은 한마디로, 나와는 '다른' 사람, '이질적인 존재'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들은 사실 대부분 '이질적 존재'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생기기 마련이다. 인종이, 종교가, 외모가, 지역이, 학력이, 성별이, 계급이, 경제력이, 아파트 평수가, 자동차 크기가, 그리고 또 무엇이 달라서 그들을 나와는 다른 '이질적 존재'로 규정하고 구별짓는 순간, 수많은 갈등과 충돌과 폭력이 발생한다. 사실은 누구나 조금씩은 특이하고 남들과는 다른 면이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누군가가 '이질적 존재'로 인식된다면, 그 누군가에게 나 역시 '이질적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토머들의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면모들은 그러한 '이질성'을 극대화시켜 놓았을 뿐, 결국 우리 주변 누군가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바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심토머들과 상담하고 그들의 자료를 관리하는 권박사 역시도 괴팍하고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다. 백칠십팔일 동안 매일 캔맥주만 마시는 기행(171쪽)을 한 공대리 역시 그 어떤 심토머 못지 않은 기인(奇人)이며, 동료 여직원인 손정은 역시 월급을 몽땅 쏟아 부어 수백개 이상의 초밥을 한자리에서 먹어치우는 인물이니,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보면 누구나가 '심토머'인 듯 보이지만, 산술적인 평균치일지, 또다른 방식의 추상적 평균치일지는 알 수 없으나, 소위 '평범한 사람'들은 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여 살아가기 마련이다. 어쩌면 '심토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경계는 허상일 뿐인 '주류'나 '평범'을 지향하느냐, 아니면 타자와의 '이질성'을 수긍하고 살아가느냐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나와 '다른'[異]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나'와 '나 아닌 것'―타자―이라는 둘[二]로 구분짓는 태도가 '심토머'들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만든 주범이다.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와의 다음과 같은 문답은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성의 근원임을 보여준다.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저는 이 폭력적인 이분법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195쪽) 전체적으로 보면, 소설 {캐비닛}에는 보편적 인류,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군대 화생방 훈련 도중 독일산 셰퍼드나 탄약과 수류탄, 자물쇠, 캐비닛, 방독면보다도 다음 차례로 분류되는 '나'의 위상을 경험(225쪽)한 공대리의 에피소드는 '인간'이란 존재 가치에 대한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권박사는 자신의 아파트 평수나 지키기 위한 이유로 여전히 반성 없이 싸우고 있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심토머들을 통해 '더 아름다운 종', '박애적인 종'이 나왔으면 하는 이상(理想)을 피력한다.(255쪽) 지금 현재 평균적 인간들의 삶과 도덕, 주류 사회의 모습이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라면, 평균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이질적 존재', 즉 '심토머'들이 '종'의 희망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공대리 역시 다음과 같이 '종'의 생존을 염려한다. 도시가 과연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묻는게 더 먼저겠죠. 종은 환경이 안정적일 때는 진화하지 않으니까요. 진화할 필요가 없으니까 진화하지 않는 거죠. 만약 도시가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그럴 거라면 결국 인간이 변해야 하겠죠. 그건 진화의 문제가 아니라 종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니까요.(276-277쪽) 또 한편으로, {캐비닛}에 등장하는 심토머들은 현대인들의 한 측면을 부각시킨 상징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들려(182쪽)고 하지만, 시간에 엄격하고 규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타임스키퍼가 되기 쉽다는 점은, 결국 심토머란 존재가 '현대인들의 병리적 집착증'의 한 단면임을 드러내준다. '불안'에 대한 언급은 소설 전체에 몇 차례 더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는 '토포러'에 대한 에피소드 부분에서, 자본주의 사회란 '불안'을 조장하여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라는 통찰로 이어진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선물한 최대의 유산은 바로 불안이에요. 보험, 증권, 부동산, 주식…… 현대 경제는 불안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알다시피 불안은 숙면의 최고의 적이에요. 그리고 불면은 다시 불안을 만드는 악순환이 진행되는 거죠.(79쪽) 늘 누군가에게 뒤쳐질까봐 불안하고, 가난해질까봐 불안하고, 예측하지 못한 사고를 당할까 불안한 현대인들이지만, 무엇보다 남과는 다른 존재, 그러니까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될까봐 불안한 마음이 무엇보다 큰 듯하다. 남과 다른 '개성'을 내세운다는 것도 사실은, 이른바 '개성시대'에 걸맞는 존재가 되지 못할까봐 불안해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은 누구나 다들 서로에게는 '이질적 존재'이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심토머'들을 경계하고 배제하고 감춰두려 하는 것은 그들이 전혀 다른 세상을 열어나갈 새로운 '종자(種子)'가 될지도 몰라서이기도 하고, 또한 그들의 존재가 현대인의 '불안'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집결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 거짓말, 소설의 어제, 오늘 그리고. 이 소설은 루저 실바리스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르티니크 섬의 상피에르 사람들을 모조리 삼켜버린 화산 폭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인 그가, 상피에르 사람들에 대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들로 그 사람들의 삶을 '유일'하게 증언하고 기록했다는 에피소드다. 이 첫 번째 에피소드가 상징하듯, 모든 기록은 거짓일 수 있다. '13호 캐비닛' 안의 모든 내용 역시 거짓일 수 있다. 그리고 루저 실바리스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허구일 수 있듯이, 소설 {캐비닛}의 이야기 모두가 허구일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처음부터 허구의 문학이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김언수의 장편 {캐비닛}은 새삼, 온통 '거짓말'로 된 문학인 소설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거짓말은 그만큼 재미있고 매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움도 들기 마련이다. 책 말미에 덧붙여진, 이 소설에 소설상을 준 심사위원들의 몇몇 지적들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인데, 특히 서두른 듯 뜬금없이 느껴진다는 점이라든가, 반복되는 에피소드로 인하여 소설이 다소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리고 괴팍한 천재 과학자, 그를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음모,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요원(?)―손정은―의 존재 등 헐리웃 영화에서 너무나 흔히 본 듯한 설정들이 '기발한 상상력'과 '흥미로운 구성'의 묘미에 못 미친다는 점도 아쉬운 지점이다. 무엇보다 너무나 많은 에피소드들과 상상력을 '13호 캐비닛'에 밀어넣은 탓에 작가의 역량이 지나치게 빨리 소진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든다. 작가의 차기작이 더 기발한 상상력과 더 명민한 성실성으로 그런 우려를 일거에 날려주길 바라마지 않는다. 계간 《시에》 2007년 봄호 게재 상업적/비상업적, 학술적/비학술적 용도를 막론하고, E-mail을 통한 사전 허락 없이 위의 글의 일부 또는 전체를 무단으로 인용 혹은 전재하거나 퍼가는 행위를 절대 금합니다. [검색 거부 / 수집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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