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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이 죽일 놈의 '국익'
황우석 박사를 둘러싼 논란이 의미가 있는 점이 있다면 '국익'이란 이름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폭발력을 지녔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일테다. (한가지 긍정적 의미를 추가하자면, '사학법' 개정에 대한 한나라당·종교단체·사학재단 등의 터무니없는 반발이 조용히 묻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라크 파병, 故 김선일씨 사망 사건, 농산물 수입 개방, 스크린 쿼터제, 항공사 조종사 노조 파업, 줄기세포 배아복제 논란 등 우리 사회의 각종 논란 때마다 '국익'이란 키워드가 개입하여 이성적 판단을 흐리고 있다. 이건희의 이익이 곧 국익이고, 황우석의 이익이 곧 국익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면 오히려 명쾌할텐데, 이 놈의 '국익'은 그리 떳떳하게 스스로를 밝히지 않고 어디론가 스며드는 것만이 장기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고무총과 후추 최루탄을 난사하는 현지 경찰에 연행되어 시멘트 맨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고, 성적 수치심까지 경험해야했으며, 불명확한 근거에 의해 기소되어 처벌될 상황에 처해 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국익'과 '민족'이란 이름하에 현지 경찰을 맹비난해야 당연할 듯 싶으나,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WTO 총회가 열린 홍콩에서 한국의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해상 시위도 했고 삼보일배도 했다. 비폭력 시위를 천명했으나, 마지막날 국내에서 시위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농민을 추모하는 의미로 상여를 메고 시위를 하다가 홍콩 경찰이 진압을 시도하자, 결국 폭력 시위로 변질되고 말았단다. 강기갑 의원의 말에 따르자면, 이 점을 시위대 스스로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만, 끓어오른 분노를 그만 참지 못한 실수였다고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연행자는 풀려났지만, 10여명의 농민들이 기소된 상태이고, 풀려나거나 귀국한 농민들 가운데에도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 상황이다.

'국익'과 '민족' 앞에 끓어오르기를 밥먹듯 하는 우리네 열혈 네티즌들은 이들의 현 상황에 대해 '국익'이나 '민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분노하거나 연대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아마도 '국민'이란 이름하에, '민족'이란 이름하에 함께 묶일 사람들이 아니어서 그런가보다.

이미 국내에서의 농민 시위 현장에서 두 명의 농민이 부상을 입은 후 사망에 이르렀다. 황박과 노박의 진실게임 속에 이들의 절규는 조용히 파묻혀가고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엔, 홍콩 WTO 현장에서, 그리고 부산 APEC 현장에서의 우리 농민들의 '반세계화 시위'는 최근 십수년간의 '시위'와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올바르게 '번지수'를 찾아간 시위였고, 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언론들은 홍콩 경찰에 후추 최루탄 세례를 받은 우리나라 농민 시위대를 도리어 고추가루 뿌리며 경찰을 공격하는 시위대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어김없이 남의 나라 국제 회의에 가서 '나라 망신'시킨 놈들 취급을 해버린다. 정말, 다음에 링크한 기사는 어떠한 '분노'로 대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

[기사] 홍콩 교민들 "국익 생각했다면" (중앙일보)

과연, 국익이란 무엇이고, '국민'과 '민족'이란 허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무엇이길래!
그들의 시위에 어떠한 연대의 제스춰도 취하지 않고 있는 내 스스로가 부끄러울 뿐이다.

[관련포스트] 아우라님 이글루 : 25. 하나 더 단상
by 갈림 | 2005/12/21 19:37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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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키위 at 2005/12/22 06:03
삼배일보, 해상시위, 상여등의 시위 모습이 현지인에게 주목을 받았다는 초기 보도들은 살짝 호들갑을 떨기도 하던데요. 꼭 머리 쓰다듬어 주면 으쓱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는 어린아이들같아요, 왜 그렇게 외국인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지. 홍콩까지 찾아가야 했던 농민들의 절박한 상황을 낳은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보도 조차 없이요.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22 13:17
키위/ 여전히 우린 외국사람들이 머리 쓰다듬어주면 너무 좋아라하지요. 그러고보니 처음엔 '한국시위문화에 홍콩인들이 감동받았다'고 하더니 '폭력시위에 대한 비난'을 보도했네요. 키위님 말씀대로, 그 이면에 대한 언급은 생략된 채로. ㅡㅡ;
Commented at 2005/12/22 18:0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23 00:00
비공개/ 추상적인 개념에 '힘'이 결합된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 아닐까요. 힘이야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정당화될 수 있고, 그 개념 자체가 구체적 실재가 되는 것은 아닐테죠. 적어도 지금 현재, 황우석 연구나 이라크 파병으로 '국익'을 얻었다면, 혹은 PD수첩의 폭로나 항공조종사 파업으로 국익에 손실이 왔다면, 그 '국익'의 실체가 대체 무엇이냔 말이죠. 그런 '국익'마저 다 같은 것으로 치부할 수조차 없을 듯 싶은데요. 다른 자리에서 길게 얘기합시다.
Commented by youngjune at 2005/12/26 09:49
매일 아침 칼바람이 몰아치는 신도림역 2번출구 앞에서는 이번 농민시위로 세상을 떠나신 두 농민에 대한 전단지를 나눠주는 민노당 당원들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들이 나눠준 전단지를 받아들면서 조그맣게 웅얼거리듯 "수고하십니다" 한마디 건내는 것 뿐...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26 14:37
youngjune/ 시위도중 농민이 둘이나 사망했음에도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냉소적 시선이 날아드는 이 사회 풍조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물론 나부터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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