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킹콩 (King Kong 2005)

<고무인간의 최후>, <데드 얼라이브>, <천상의 피조물들>을 만들던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을 때, 그의 팬들조차도 성공을 의심하기 마련이었다. 피터 잭슨이 '킹콩'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구상중이라는 얘기에 제작사들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던 것도 당연할 일이었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대성공 이후, 그의 <킹콩> 프로젝트는 어느 제작사라도 달려들만한 '황금알'이 되어 있었다. 2005년 피터 잭슨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킹콩'은 감독에게 연출비만 200억원을 건넸고, 총 제작비 2000억원을 넘는 엄청난 규모가 되어버렸다. 같이 개봉한 국내 최대의 대작 <태풍>이 제작비 150억원을 들였다고 하니, 왠지 초라해보일 지경이다.
피터 잭슨의 <킹콩>에 대해 개봉 전부터 흘러나온 평들은 워낙 대단한 것이었다. '리메이크 영화의 모범'이란 말부터 '피터 잭슨은 오손 웰즈 이후 최고의 천재 감독', '영화가 사라지는 미래에도 이 영화는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는 찬사까지 온갖 수사가 다 동원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찬사에 대해 '한마디로 공감'이라는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찬사'의 러시는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타당할 때가 더 많은 터, 일단 <킹콩>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거리부터 찾아보자. (억지스럽게) 꼽아보자면 첫째, '뻔한 스토리'다. 둘째, '마초적'이다. 셋째, '원시와 문명에 대한 태도가 불분명'하다. 뭐, 대략 이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1933년 원작 <킹콩>은 1976년 제시카 랭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었고, 이번에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킹콩 對 고질라'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점을 특히 주목하라.) 이번 작품 역시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없다. 아니, '엔딩'까지 고스란히 '다시 만들기'를 했다고 보면 된다. 팀 버튼이 2001년 리메이크했던 <혹성탈출>과 같은 '반전'도 없다. 사실, <킹콩>의 스토리는 워낙 널리 알려져 있고, <고질라>, <쥬라기공원>, <딥블루씨>와 같은 영화들 모두가 그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들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뻔한 스토리'라는 비난은 애초에 <킹콩>에겐 가당치 않은 공격이다.


(이하 스포일러 약간 포함)
이 영화가 '마초'적이라는 것은 터무니없지는 않은 얘기다. 콩이 앤(나오미 왓츠)에게 접근하는 태도, 그의 사랑의 방식은 전형적인 '마초'의 그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공룡과 함께 정글에서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콩에게 그런 비난을 가하는 것이 합당해보이지는 않는다. 콩에게 'King'이란 이름을 붙이고 공연 무대에 올린 '문명인(?)들'이나 초식동물인 콩에게 '살아있는 인간 제물'을 바치는 '원주민(?)'들이 마초적이라는 비판이라면 그것은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이 영화 속의 '앤'은 과거의 <킹콩> 영화 속 여주인공들에 "비해" '콩'에게 비교적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교감하고 있다.
원시와 문명에 대한 태도가 불분명한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상징되는 문명에 대한 비판은 이 영화의 원작들이 줄곧 견지했던 관점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에 대한 묘사를 볼 때에는, <반지의 제왕>, 아니 그 전작들로부터 쭉 피터 잭슨 감독에 대해 아쉬운 점일 수밖에 없다.

피터 잭슨의 <킹콩>에서 전작들과 비교되는 지점은 역시 실감나는 '그래픽'이다. 이 점에 대해선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그저 좋은 영화관에서 관람하시란 말밖에 전할 길이 없다. 아울러 이 영화를 스필버그나 루카스, 심지어 버호벤이나 카메론이 본다면, 그들 각자가 엄청나게 자존심 상해할 것이 틀림이 없다는 말만 보태놓겠다.
차라리 공정한 비교를 하자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을 주목하는 것일테다. '앤' 역할을 맡은 나오미 왓츠는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아름다운 '바비 인형' 같은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내었다. 교성에 가까운 비명 소리 말고도, 그의 연기를 높이 평가할만한 부분은 적지 않다. 킹콩 앞에서 천진한 모습으로 저글링하는 모습이 압권이다. <스쿨 오브 락>에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던 잭 블랙은 고집불통의 칼 덴헴 감독 역을 맡아 '피터 잭슨'의 분신인 양 보이기도 하지만, 상투적인 캐릭터를 재현하는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씬 레드 라인>, <피아니스트>의 애드리안 브로디는 극작가 잭 역할을 맡았는데, 저 배우의 주전공이 원래 '로맨틱 코메디'가 아니었을까 의심될 만큼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빌리 엘리오트>의 어린 빌리, 제이미 벨은 약간은 불안한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암흑의 핵심'을 탐독하는 선원 지미 역을 맡았는데, 기대만큼 비중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제일 돋보이는 것은 역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은 앤디 서키스다. 그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골룸의 목소리와 모션 캡쳐를 담당했는데, 이번에는 <킹콩>의 모션 캡쳐 역할을 맡았다. 그에게 '주연상'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이 쏟아질만큼 킹콩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물론, 기술과 돈의 힘도 컸겠지만.

사실 피터 잭슨이 만든 <킹콩>의 화면에 시종 압도당하면서, 세시간의 런닝타임이 어떻게 지나갔나 모르게 손에 땀을 쥐며 빠져들면서도,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애초에 담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원작인 <킹콩> 이외에도 <구니스>, <인디애나 존스>, <쥬라기 공원>, <지옥의 묵시록>, <타이타닉>, <스타쉽 트루퍼스>, 심지어 자신의 전작 <반지의 제왕>까지, 거의 모든 헐리웃 대작 영화들을 하나하나씩 능가하는 장면들을 보여줄 때에도, '돈과 기술'이 영화의 전부가 아님을 역설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센트럴파크의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한 것은 피터 잭슨의 <킹콩>은 '환타지'라는, 영화란 장르의 진면목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보여준, 한마디로 '엄청난 영화'라는 점이었다. 그리곤, 조용히 '감탄'하는 일만 남았다. 물론, 타르고프스키나 피터 그리너웨이와 같은 이들이 이 영화의 정반대쪽 정점에 여전히 서있게 되겠지만, <킹콩>이 보여준 스펙터클하고 환상적인 스릴과 로맨스도 또 한쪽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란 점을 의심하긴 힘들 것이다.

p.s.1.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지난 가을 출몰했던 굶주린 '멧돼지 떼'들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야생의 동물들이여. 모든 것이 인간의 욕심이 가져다 준 재앙일지니.

p.s.2. 뉴질랜드에 재현된 1930년대 뉴욕의 모습이나 '해골섬'의 모습이나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다. 다만 해골섬에서 쫓겨다니는 장면과 후반 비행기 장면에선 다소간의 어색함이 엿보인다. 물론, 괜한 트집이다.

p.s.3. 킹콩에겐 허리 디스크가 있을까? 디스크닥터는 필요 없나?

+추가 p.s.4. rumic71님의 트랙백을 보고 추가.
초반부에 나오는 칼 덴험 감독의 대사를 놓치지 말 것.
"페이 레이를 불러보면 어때?" "RKO에서 영화 찍고 있어요." "쿠퍼꺼?"
(1933년판 감독이 메리안 C. 쿠퍼, 제작은 당시의 공룡제작사 RKO, 여자주연은 페이 레이.)

by 갈림 | 2005/12/14 19:55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9)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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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unamoth at 2005/12/14 21:03
선원 지미가 빌리엘리엇 이었군요! 몰랐습니다. 크레딧에서 앤디 서키스 이름보고 딱 앗 골룸이 킹콩까지!란 생각이 들더군요.

여튼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중반부 롤러코스터?는 정말 영화관에서 봐야될 부분인듯 싶고요.
Commented by bindoong at 2005/12/14 23:10
이곳도 오늘부터 개봉이다. 예고편을 보면서도 무척이나 흡족했었는데 빨리 보러 가야겠구나 ^ ^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15 01:56
lunamoth/ 예, 지미가 빌리였습니다. ^^;; 정말 훌쩍 커버렸더군요.

bindoong/ 정말 전세계 동시 개봉인가보네. ^^
Commented at 2005/12/15 14: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15 15:21
비공개/ 너무 늦은 듯 싶어, 죄송합니다. 좋아하시니 다행입니다. ^^
Commented by 고기 at 2005/12/15 18:00
그래 빙판위의 장면만으로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되더라. -새벽까지 마감하고 아침부터 울고왔더니 머리가 아직도 깨진다;;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16 01:21
고기/ 그러게. 빙판 위 장면은 정말 쵝오~! ^^
Commented by youngjune at 2005/12/16 14:07
영화 별점에 짜기가 동해안스러운 네가 이리 후한 점수를 주는 걸 보니 꼭 한번 관람해야겠는걸?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16 16:44
youngjune/ 환상적인 영화긴 한데, 사실 어제오늘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 훨씬 '환타스틱'하다. ㅡㅡ;
Commented by 마르스 at 2005/12/17 13:27
앤디 서키스, 얼굴을 비추긴하죠. 다른 역이긴 하지만요. ^^ 그리고, 에이드리언 브로디에 대한 평에 100% 동의합니다.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17 13:30
마르스/ 아, 앤디 서키스가 얼굴을 비췄군요. 미처 몰랐네요. ^^;;;;
Commented by Needle at 2005/12/17 14:07
담배 씹는 요리사 아저씨가 앤디 서키스랍니다 ^^
Commented by WindFish at 2005/12/17 15:02
영화평도 이오공감에 올라오긴 하는구나;;...
Commented by 요연 at 2005/12/17 15:59
저는 잭블랙 좋았는데.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덴험 감독 그 사람이 좀 대책없잖아요. 근데 하나도 짜증나지가 않고 무모함이 귀엽더라구요. 이건 잭블랙이 안맡았으면 얻기 힘들었을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애드리안 브로디는.. 생각보다 비중이 없더군요. 전 이 사람 얼굴이랑 분위기가 참 맘에 들엇어요. 계속 이런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 많이 나와줬으면 좋겠어요(저도 멜로.. 흐흐.. 근데 왠지 이사람이 나오면 어딘가 싸이코스러울 것 같음)
Commented by 휘빗 at 2005/12/17 20:18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흥분 외에도 왠지-막 너무 좋아만하면 스스로가 시류에 휩쓸리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자조적인 기분때문에 애써 트집잡을 면을 곰곰히 생각해봤었는데, 갈림님 리뷰를 보고나니 그냥 감탄만 했어도 충분히 설득력있는 영화를 본게 맞구나~라는 일종의 안도감?이 들었어요^^; 이오공감 타고 왔다가 괜히 혼자 기뻐하고 갑니다.히히. 피터잭슨 만세!!
Commented by 갈림 at 2005/12/18 11:32
Needle/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

WindFish/ 가끔 올라와요.
저는 묘하게도 영화리뷰만 이오공감에 세차례 올랐네요. ^^

요연/ 정말 잭블랙이라서 좀 귀엽게 보이긴 하더군요. ^^;

휘빗/ 저도 딱 그런 기분으로 영화를 봐서 그런가봐요. 하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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