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루시아 (Lucia y el sexo)

이미 몇차례 국내 영화제─특히 작년말 이벤트처럼 열린 스페인 영화제─를 통해 국내에도 꽤 알려진 훌리오 메뎀 감독의 영화가 처음으로 개봉되었다. 2001년 작품으로, 스페인에서는 150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했던 영화 <루시아>.
<루시아>의 주인공을 맡은 파즈 베가. 최근 <스펭글리쉬>로 헐리웃에 진출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루시아와 섹스 Lucia y el sexo>, 영어 제목은 <섹스와 루시아 Sex and Lucia>다. 지금 필름포럼2관에서 <'Love Object'>란 영화가 <섹스마네킹>이란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자극적인(?) 원제 대신 차라리 평범한 제목을 택한 셈이니 말이다. (사실, 좀 노골적인 제목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가 쑥스러울 경우가 있다. 멀티플렉스 극장에선 대개 번호표 뽑아들고 순서가 되면 매표직원에게 '무슨 영화 보시려구요?'라는 질문을 들어야 하는데, 앳되어 보이는 여직원 앞에서 '섹스 앤 루시아 한장이요'라고 말해야한다면 거참 쑥스럽기도 하다. 나만 그런가?) 사실 제목은 순화(?)되었지만, 이 영화는 노골적인 장면들이 무삭제로 심의 통과되었다는 것으로 이미 화제가 되었고, 그것을 홍보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야 뭐, 어쩔 수 없는 것. 일단, 예전 '딴지영진공' 식으로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소개해보겠다.

 * 살색 피부 노출 과다에 대한 기피자 관람 불가.                                    .
* 현실/허구, 과거/현재 뒤죽박죽된 영화 기피자 관람 불가. 그 외 관람 추천



스페인 영화하면, 일단 루이스 브뉘엘과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정도가 떠오른다. 3년전 개봉했던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는 예상외로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도 했었다. 훌리오 메뎀 감독은 현재 알모도바르와 함께 스페인의 대표적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녀에게>보다 1년 먼저 만들어진 <루시아>에는 <그녀에게>에도 등장한 두명의 여배우가 출연하고 있다. <그녀에게>에서 초미니 인간이 된 남자를 자신의 몸 안에 받아들이는 '영화 속 흑백영화'의 여자과학자 역할을 한 파즈 베가가 주인공 '루시아' 역할을 맡았고, <그녀에게>에서 여행잡지 기자 마르코의 어린 옛 애인 안젤라 역할을 맡았던 엘리나 아나야(요 아래 우측 사진. 이 배우 얼핏 강혜정의 필도 나는데, 아주 주목해볼만 할 듯.)가 귀여운 아이의 보모 '벨렌'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 부산영화제에서 본 기억이 있는 <네임리스>에 출연한 트리스탄 우요아가 세명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소설가 로렌조 역할을, <오픈유어아이즈>에 출연했던 나즈와 님리가 로렌조와 6년전 뜨거운 사랑을 나눈 낯선 여인 엘레나 역할을 맡았다.

<루시아>의 대강 스토리는 이렇다. 소설가 로렌조는 자신의 생일날, 어느 섬에서 낯선 여인을 만나 뜨거운 섹스를 나눈다. 서로 이름도 알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떠나는데, 이때 이 여인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홀로 '루나'라는 딸아이를 낳는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마드리드로 돌아온 로렌조는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웨이트리스 루시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로렌조는 루시아와 동거를 하면서, 섬에서의 낯선 여인을 떠올리면서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로렌조는 더이상 소설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6년의 세월이 흘러간다. 창작의 고통, 그리고 또다른 충격에 사로잡힌 로렌조는 루시아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마드리드를 막 떠나려는 순간, 로렌조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루시아 역시, 아픔이 남겨진 마드리드를 떠나 낯선 섬으로 향한다.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는 '멜러드라마'의 스토리일지 모르겠지만, 영화 <루시아>는 이 이야기를 로렌조의 소설과 현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놓은 편집을 통하여, 매우 긴장되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아름다운 스페인의 풍광이 어우러지면서, 이 영화는 상당히 매혹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다. 영화는 로렌조의 교통사고, 그리고 루시아가 섬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후반부에 연속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일종의 '반전'은 이 영화의 '재미'와 스페인 현지 '흥행'이 결코 음모 노출이나 발기되는 남성을 클로즈-업하는 따위에 힘입은 것만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스페인 영화에서야 그다지 낯선 장면도 아닐테니...)

6년전의 뜨거운 섹스는 하나의 추억이 되어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추억을 소설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 작업이 진전되어 갈수록, 추억은 끔찍한 현실로 다가온다. 조각난 기억들을 맞춰나가는 행위가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극으로 끝맺음을 하지 않는다. 파도가 거세면 마치 배처럼 출렁이는 묘한 '섬' 위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삶에 상처를 낸 순간으로 되돌아가 그 상처를 감싸 안는다. 영화의 오프닝에 보여지는 바다 속 풍경은, 생의 근원인 자궁 속을 상징한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빛'은 아주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의 이름 '루시아'는 '빛'의 의미를 담고 있고, 남자주인공 '로렌조'는 '태양'의 다른 이름이며, 그의 사생아 '루나'는 '달'의 다른 이름이자, '자궁'의 다른 이름이다. 영화는 빛의 노출을 다소 극단적으로 밝게, 때로는 어둡게 조절하며 내러티브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시도나 현재에 안주하려는 생각은 '밝음'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결과는 '어둠' 속에서 만나게 되는 식이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바다가 있어야 육지가 있듯, 사랑은 이별을 통하여 시작되며, 다시 찾아올 그 끝은 또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끝을 알 수 없는 구멍─빛이 완전히 차단된 곳─으로 빠져들 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욕망에는 언제나 절제가 필요하는 것, 그리고 추억을 무모하게 되짚으려는 과오 역시 피해야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별점 : ★★★★

by 갈림 | 2005/09/03 14:07 | 談話 ::: 기고/생각들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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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bindoong at 2005/09/03 19:22
오호 저 아가씨 이쁘지....스토리는 좀 심심했던 기억이...
Commented by reme19 at 2005/09/04 05:09
보고싶은 영화 중 하나예요.^^ 그나저나 러브 옵젝트를 섹스마네킹으로 만들어버리는 센스란!! ㅜㅜ
Commented by 박즉자 at 2005/09/04 09:20
전 방학 때 '금자씨'랑 '옹박' 봤는데, '옹박' 강추!
(안보려다가 억지로 봤는데 반했어요~) 옹박은 유일한 단점은 로맨스가 없다는 것. 남자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도 없고, 남자주인공을 좋아하는 여자도 없고 =.=;;
Commented by 갈림 at 2005/09/04 11:10
bindoong/ 스페인 아가씨들, 좋아라~. ^^

reme19/ 그러게 말이예요. 몇몇 포탈에선 검색도 안되더라구요...

박즉자/ 오오... 너도 꽤 오래전부터 이글루 블로거였구나. 몰랐네~ ^^
Commented by 키위 at 2005/09/04 15:09
스폐인은 멀티플렉스에 초토화 되어 자국 영화 상영이 여타 서유럽 국가에 비해 대단히 저조하데요. 제가 사는 곳은 스폐인에서 가까운 곳이라 매년 스폐인 영화제가 열리고, 스폐인에서 개봉 못한 독립영화들이 외려 개봉하기도 해요.

스폐인 여자들은 모르겠고, 젊은 남자들은 깐죽깐죽 귀엽던데. ㅎㅎ
Commented by 갈림 at 2005/09/04 16:26
키위/ 그러고 보면,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같은 흥행작도 예술영화관에서 단관 개봉을 하고 있는 현상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음은, 참으로 희한한 일인 것 같아요.
Commented by b at 2005/09/05 12:48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가 처음에 일본(? 유럽이었나?)에서는 세계의 끝으로 미국에서는 하드보일드원더랜드로 출판되기를 요구받고, 우리나라에선 일각수의 꿈으로 소개된 거랑 비슷하네요. 어쨌든 루시아보다는 섹스앤루시아나 루시아앤섹스가 좀 더 흥행에 도움이 될 듯 한데..제목도 가위질을 당하나보죠?
Commented by 갈림 at 2005/09/05 13:30
b/ 영화 내용은 '전혀' 가위질되지도 않았고, 풍선도 안 뜨지. 글쎄, 그렇기 때문에 제목까지 굳이 노골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걸까. 그건 그렇고, '노르웨이의 숲'이란 어색한 제목보다는 '상실의 시대'란 제목은 훌륭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일각수의 꿈'은 좀......
Commented at 2005/09/05 18: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갈림 at 2005/09/05 23:12
비공개/ 음...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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