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7월 28일
[리뷰] 친절한 금자씨
꽤 오랜 기간 침체되었던 한국영화계가 하반기 기대작들의 잇단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주부터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감독), <웰컴투 동막골>(박광현 감독), <박수칠 때 떠나라>(장진 감독)가 1주일 간격으로 개봉된다. (세 편의 영화 모두에 신하균이 출연한다.) 그리고 <형사>(이명세 감독)가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불길한 소문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긴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대작 <야수>(김성수 감독), <태풍>(곽경택 감독), 그리고 <청연>(윤종찬 감독) 등은 겨울 개봉이 예정되어 있으니, 올 하반기는 꽤나 풍성한 극장가가 될 듯 싶다. (참고로 또 하나의 기대작 <괴물>(봉준호 감독)은 CG 작업이 많아 내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친절한 금자씨>는 장금이 '이영애'와 칸 심사위원대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JSA>에 이어 두번째로 만난 영화인 덕분에, 가장 큰 관심을 받아왔던 영화였다. '박찬욱' 감독의 네임 파워는 실로 대단해서, 해외판매로만 이미 50억을 넘는 수입을 거두었다고 한다. (일본 30억, 미국 4억, 프랑스, 이탈리아 등) 그리고 이미 베니스 경쟁부문에도 공식 초청되었다.
(이하에는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있는 내용은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영화 내용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읽기를 권하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의 간단한 시놉은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유괴살인범으로 13년간 복역하고 나온 '친절한 금자씨'(이영애 분)가 '백선생'(최민식 분)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올드보이>에서 대다수의 관객들은, 영화 속 오대수처럼, '이우진이 왜 오대수를 가뒀는가'에 집중하느라 '왜 오대수를 풀어주었는가'를 놓치고 있었다. <친절한 금자씨>를 보는 관객들은 아마도 몇가지 '적절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영화를 보리라고 마음을 먹고 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도 그랬다.
위의 시놉시스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제기할 수 있는 질문들은 대략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금자씨는 정말 유괴 살인범이었을까?'
'금자씨는 왜 친절한 금자씨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그녀의 친절함의 목적은 무엇인가?)
'금자씨는 왜 백선생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까? (백선생은 누구인가?)'
'금자씨는 백선생을 어떠한 방법으로 복수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복수는 성공할 것인가?)
그런데, 사실 이 영화에서 이러한 질문들은 '의외로' 커다란 긴장감 없이 풀려나간다. 아마도 <친절한 금자씨>에 대해 관객들이 다소간 실망한다면, 바로 '질문'과 '대답'이라는 반복 과정이 쉽게 풀려나가는 부분에 대한 것일 듯하다. 이 영화의 관객들이 박찬욱식 스릴러물를 기대했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꽤 많은 실험을 감행한다. 사람의 머리를 한 썰매를 끄는 '개'가 등장하는가 하면, 'TV인간극장'에 나올법한 나레이션이 금자의 행동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복수3부작의 최종편'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지나치게 많은 카메오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후반 1/3 부분의 내용 자체가 실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실험들은 '웃음'을 간간히 주는데는 성공적이었지만, <공동경비구역JSA>나 <올드보이>에서 극 전반에 걸쳐 느껴졌던 팽팽한 긴장감이 이 영화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실험들 때문이라 여겨진다.
감독 스스로 말하듯, 이 영화는 극 후반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존재한다. 그 터닝 포인트는 '금자씨'가 개인적 차원의 복수를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마지막 '교실 시퀀스'와 '성찬의 전례'의 내러티브적 근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터닝 포인트'가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악인'임은 분명하나, 최민식이란 배우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시민 아우라'가 너무나 강한 '백선생'에 대한 복수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고 통쾌하지도 않다. 사실 인간미 없고 짐승같아 보이긴 하지만, '13년 뒤'에 대한 별다른 대비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백선생'은 꽤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그런 '백선생'일지라도, 관객들조차 그가 '13년간 착하고 친절하게 살아왔을 것'이라는 착각만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금자씨'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복수를 꿈꿔왔던 것일까?
박찬욱 감독은 '복수 연작'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개인의 원한에 대한 사적(私的) 사법(司法)이라 할 수 있는 복수'가 과연 정당한 방식인지, 과연 복수의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복수당할 만큼의 원한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있을지 등등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란 본래,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구원을 꿈꾸는 사람이 넘보아야할 단어가 아니다. 복수는 '처절하게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극한적 상황에서 꿈꾸는 로망'이기 때문이다. 중재되거나, 중개되는 복수는 이미 복수가 아니다.
요컨대, 강렬했던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해, 빈틈없었던 <올드보이>에 비해 <친절한 금자씨>는 적지 않이 실망스러웠다. 그건 박찬욱 감독의 자업자득이다. 미술, 음악, 촬영 다 괜찮았고, 미장센은 훌륭했지만,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러게, 누가 <공동경비구역JSA>이래로 그렇게 멋지고 환상적인 영화들을 연달아 찍어대래? 관객의 기대치를 높여놓은 건, 당신 자신이라고!
p.s.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했던 것은 실감나는 '소음들'을 표현한 '녹음'과 '음향' 분야다.
평점 : ★★★

(이하에는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있는 내용은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영화 내용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읽기를 권하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의 간단한 시놉은 이미 널리 알려진대로, 유괴살인범으로 13년간 복역하고 나온 '친절한 금자씨'(이영애 분)가 '백선생'(최민식 분)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올드보이>에서 대다수의 관객들은, 영화 속 오대수처럼, '이우진이 왜 오대수를 가뒀는가'에 집중하느라 '왜 오대수를 풀어주었는가'를 놓치고 있었다. <친절한 금자씨>를 보는 관객들은 아마도 몇가지 '적절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영화를 보리라고 마음을 먹고 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도 그랬다.
위의 시놉시스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제기할 수 있는 질문들은 대략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금자씨는 정말 유괴 살인범이었을까?'
'금자씨는 왜 친절한 금자씨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그녀의 친절함의 목적은 무엇인가?)
'금자씨는 왜 백선생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까? (백선생은 누구인가?)'
'금자씨는 백선생을 어떠한 방법으로 복수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복수는 성공할 것인가?)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 꽤 많은 실험을 감행한다. 사람의 머리를 한 썰매를 끄는 '개'가 등장하는가 하면, 'TV인간극장'에 나올법한 나레이션이 금자의 행동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복수3부작의 최종편'이라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지나치게 많은 카메오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후반 1/3 부분의 내용 자체가 실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실험들은 '웃음'을 간간히 주는데는 성공적이었지만, <공동경비구역JSA>나 <올드보이>에서 극 전반에 걸쳐 느껴졌던 팽팽한 긴장감이 이 영화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실험들 때문이라 여겨진다.
감독 스스로 말하듯, 이 영화는 극 후반 한 차례의 터닝 포인트가 존재한다. 그 터닝 포인트는 '금자씨'가 개인적 차원의 복수를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마지막 '교실 시퀀스'와 '성찬의 전례'의 내러티브적 근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터닝 포인트'가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악인'임은 분명하나, 최민식이란 배우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시민 아우라'가 너무나 강한 '백선생'에 대한 복수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고 통쾌하지도 않다. 사실 인간미 없고 짐승같아 보이긴 하지만, '13년 뒤'에 대한 별다른 대비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백선생'은 꽤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그런 '백선생'일지라도, 관객들조차 그가 '13년간 착하고 친절하게 살아왔을 것'이라는 착각만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금자씨'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복수를 꿈꿔왔던 것일까?
박찬욱 감독은 '복수 연작'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개인의 원한에 대한 사적(私的) 사법(司法)이라 할 수 있는 복수'가 과연 정당한 방식인지, 과연 복수의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복수당할 만큼의 원한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있을지 등등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란 본래, 이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구원을 꿈꾸는 사람이 넘보아야할 단어가 아니다. 복수는 '처절하게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극한적 상황에서 꿈꾸는 로망'이기 때문이다. 중재되거나, 중개되는 복수는 이미 복수가 아니다.
요컨대, 강렬했던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해, 빈틈없었던 <올드보이>에 비해 <친절한 금자씨>는 적지 않이 실망스러웠다. 그건 박찬욱 감독의 자업자득이다. 미술, 음악, 촬영 다 괜찮았고, 미장센은 훌륭했지만,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러게, 누가 <공동경비구역JSA>이래로 그렇게 멋지고 환상적인 영화들을 연달아 찍어대래? 관객의 기대치를 높여놓은 건, 당신 자신이라고!
p.s.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했던 것은 실감나는 '소음들'을 표현한 '녹음'과 '음향' 분야다.
평점 : ★★★
